6'25 발발은 당시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결정적 오판 때문이었다. 당시 국무장관 애치슨은 북한의 남침보다 남한 군대의 북침 가능성을 더 높게 봤다. 그래서 트루먼 정부는, 당시 도쿄의 연합군총사령부에 근무했던 미국 외교관 윌리엄 시볼드에 따르면 탱크, 중포, 경포 및 군용 항공기의 제공을 거부했다. 이미 북한은 그런 무기로 중무장하고 있었으나, 트루먼 행정부 내 누구도 그런 사실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미국 내 여론은 공산주의 확산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빨갱이 사냥'에 나설 수 있었던 토양이기도 하다. 공화당은 이런 분위기를 업고 트루먼 행정부가 공산당의 도전에 무능하다는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이런 공격이 여론에 먹혀들면서 트루먼 정부는 위기 탈출 방안을 고심했다.
그래서 취한 조치가 'NSC-68'이란 국가안전보장위원회 문서의 승인이었다. 그 내용은 "향후 미국 GNP (국민총생산)의 20%를 국방에 투입하며, 지역을 막론하고 비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그 어떤 공산주의의 위협도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여기서 또 실수를 저질렀다. 이 문서를 공표하지 않고 비밀로 한 것이다. 트루먼이 이 문서에 서명한 날은 1950년 4월 25일로, 바로 공표됐다면 6'25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게 역사학자들의 진단이다.
6'25는 우리에게도 재앙이었지만 트루먼에게도 재앙이긴 마찬가지였다. 공산당에게 무능하다는 공화당의 공격이 재연됐고 여론은 악화됐다. 트루먼은 승리가 절실했다. 맥아더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어떤 조건에서도 승리하는 능력을 태평양전쟁에서 이미 입증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뒤집으면서 트루먼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인천상륙작전이 갖는 그 의미는 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국뽕'(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이란 평론가들의 조롱이 우습다는 듯 개봉 닷새 만에 관람객 262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대박'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조롱 가운데는 '멸공의 촛불'이란 것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영화 애호가들의 호응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멸공의 촛불이라고? 그래서 어쨌는데?"
정경훈 논설위원 jghnu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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