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제대로 하세요
성공한 사과와 실패한 사과는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 에드윈 L. 바티스텔라 미국 서던오리건대 인문학부 교수는 언어학자다. 언어학에 사회학, 심리학, 문화적 배경 등을 종합해 '사과(謝過'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론'을 펼친다.
저자는 "사과도 기술"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특히 중점을 두는 분야는 다중을 향한 '공개 사과'다. 단순한 테크닉이나 기교 수준을 뛰어넘는 예술에 가까운 기술을 요구한다. 어떤 공개 사과는 사과한 사람이나 기관의 이미지를 끌어올려 주는 전화위복 효과를 낸다. 그러나 어떤 공개 사과는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불쏘시개 구실을 한다.
이달 15일 황교안 국무총리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경북 성주를 찾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관련, 정부 입장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을 주민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황 총리와 한 장관은 물병, 계란, 소금 세례를 받았고, 주민들이 포위하자 버스에 6시간 30분 동안 갇혀 있다 겨우 빠져나왔다. 이 사과는 실패였다. 왜일까.
저자는 완전한 사과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사과하는 이가 수치심과 유감을 표현하고, 특정한 행동 규칙의 위반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외면이나 배척에 공감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또한 잘못된 행위를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그 행위와 이전의 자신을 비판하며 앞으로 바른 행동을 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속죄하고 배상을 제시해야 한다.'
황 총리와 한 장관은 정부 입장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지만, 배상, 그러니까 늦었더라도 사드 배치 장소 선정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주민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겠다는 등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정부 입장은 정해진 것이니 사과 받고 양해해달라는 얘기였다. 저자는 "사과는 사과받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과는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적시' 단계와 피해자가 사과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응답'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황 총리와 한 장관의 사과는 적시 단계는 어느 정도 밟았지만, 응답 단계는 대충 건너뛴 측면이 도드라진다. 황 총리와 한 장관은 사과가 통하지 않자 그냥 도망친 셈이다.
그래서 이후인 26일 성주를 방문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군민, 경북도, 성주군, 미군, 새누리당이 모두 참여하는 '성주 안전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것은, 황 총리와 한 장관이 실패를 겪은 응답 단계를 어느 정도 보완한 것으로 풀이된다. 매일신문 27일 자 '정진석 "국방부가 잘못"…군민들 '화' 조금 풀렸다' 기사에서는 '26일 성주 군민들은 정말 오래간만에 '말 같은 말'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마치 벽을 보고 말하는 듯했던 국방부 등 중앙정부 관계자들과의 대화와는 완전히 다른 '답변 같은 답변'을 비로소 들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날 정진석 원내대표는 계란 세례를 받지 않았다.
이처럼 사과하고 싶어도 기술이 모자라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사과는 실천하기 어려운 행위다. 사람들은 보통 사과를 굴복이나 체면을 구기는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과가 자기 평판을 복구시켜주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면 차라리 하지 않아서다.
미국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1972년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비밀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야당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들킨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하면서도 사과는 하지 않았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닉슨의 사임 연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유감 표명이지 잘못을 사과한 것은 아니었다. 또 닉슨은 1984년 한 TV 인터뷰에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 줬다. 나는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밝혔다. 저자는 닉슨의 사과 거부가 자기 이미지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체면치레와 침묵의 조합이라고 봤다. 정치가, 공직자, 기업가들이 비리'비위에 따른 사임, 사퇴, 퇴진을 사과와 동일시하는 행태는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이 사람들아, 그거 사과 아니다.
실은 '기술'만 탓할 일이 아니다. 기술과 그 바탕에 깔린 '진심' 모두 꽝인 공개 사과가 요즘 신문지면을 도배하고 있어서다.
최근 3년 동안 거쳐 간 자신의 운전기사 12명 중 일부에게 하루 근로시간 18시간을 강요하고 그중 한 명을 폭행하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정일선 현대BNG스틸 사장의 사과, 게임업체 넥슨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진경준 검사장 구속 사태에 대한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사과, 현재 국정조사가 진행 중인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영국 옥시사의 사과 등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여러 이슈 속 가해자 내지는 책임자들의 공개 사과는 '변명 같다' '면피용이다' '연기 같다' 등의 반응을 얻고 있다.
정일선 사장은 자신이 직접 썼는지 비서실에서 써줬는지 알 수 없는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것으로 사과를 '퉁쳤고', 김현웅 장관은 수시로 터져 나오는 검찰 비리'비위에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뻔한 내용으로 국민들에게 해묵은 기시감만 줬으며, 옥시사의 책임회피형 사과는 되레 불매운동에 불을 지피며 자기 무덤만 파는 꼴을 만들고 있다.
'기술'을 제목에 가져다 붙인 이 책도 말미에서는 결국 진심을 강조한다. "사과에서 후회가 화자의 감정을 진심으로 드러낼 때, 사과는 신실해진다."
340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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