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참여마당] 수필: 서리, 그 넉넉한 마음

입력 2016-06-22 18:13:31

# 서리, 그 넉넉한 마음

살구를 따기 위해 뒷밭으로 가서 살구나무를 쳐다보니 초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소년 두 명이 살구를 따고 있었다. 주인 몰래 살구를 봉지에 따 담는 이른바 '살구 서리'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소년이 비닐봉지에 살구를 가득 채우도록 그냥 놔뒀다.

나 자신이 소년이었을 때 나는 참외서리 사과서리 수박서리 밀서리 콩서리 심지어는 닭서리까지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용케 나무에 올라가서 살구를 딸 수 있는 그 소년들이 대견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는 친구들과 밀서리를 하는 도중 주인에게 들켜서 도망갔을 때 나이 40이 넘은 그 주인아저씨가 동네 끝까지 따라와서 기나긴 마라톤을 한 일을 생각해내고는 속으로 웃었다.

서리를 용납하는 주인의 관용과, 한 입 구걸하는 정도의 최소량의 도둑질인 서리를 즐거워하는 젊은이들의 애교가 상호 양보하여 서리문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원래 인심이 후한 한국의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때 수확의 30% 정도는 선심을 쓰기 위해 여분의 땀을 흘린다. 사위에게 줄 씨암탉, 서리하는 자들이 따갈 과일, 이웃에게 나누어줄 별미 과실들, 까치밥, 상인에게 덤으로 주는 10%의 우수리 등등이 그것이다.

서리를 관용하는 정도는 지방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인심이 후한 지방일수록 관용의 폭이 넓다. 인심 좋은 충청도의 경우는 군인들이 많은데 주인이 보는 데서 몇 개의 감을 따도 주인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흘린 땀의 100%를 전부 화폐로 교환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미덕의 몫으로 돌렸던 옛날 농부들의 넉넉한 마음이 서리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권혁환(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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