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병신창의 2주갑(120주년)…청송 선비들 책 덮고 의병으로

입력 2016-05-12 22:30:02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을 배출한 청송군은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만들고 구국 활동에 앞장선 의병 선열 2천425명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청송군 제공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을 배출한 청송군은 항일의병기념공원을 만들고 구국 활동에 앞장선 의병 선열 2천425명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청송군 제공
1995년 청송 심씨 문중에서 전해져 온
1995년 청송 심씨 문중에서 전해져 온 '적원일기'(赤猿日記)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진 청송의병의 구국 활동이 세상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청송군 제공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劃策)한 정변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후 친일계 인사를 통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의 을미개혁을 진행했다.

을미개혁은 시기적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직후 국민의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강행됐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또한 유교적 문화가 짙었던 당시 국민에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투를 자르게 하는 단발령(斷髮令) 등을 강제로 시행하면서 전국의 유림을 중심으로 반일'반개화 의병운동을 펼치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1896년 병신년 새해 산골에서 유학을 배우던 청송의 선비들은 서적을 덮고 탁상을 물린 뒤 일본에 대항해 구국 의지를 불태웠다.

◆병신창의

1896년 병신년 청송 심씨 문중의 소류 심성지(1831~1904)를 대장으로 청송군 객사에 지휘부를 둔 청송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소류는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건해 그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병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송의병은 병신년 새해를 보내고부터 인근 용전천 백사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해 5월 14일 청송의병은 김하락(1846~1896)이 이끄는 이천의병과 김상종(1847~1909)의 의성의병 등과 함께 청송 안덕면 감은리에서 북진하던 일본군을 협공으로 무찔렀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던 일본군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그 기세까지 이어간 전쟁이 일명 감은리전투다.

감은리전투는 청송의병에게는 만만치 않은 전쟁이었다. 당시 청송의병은 양반 출신의 지휘부 75명과 포수, 농민, 보부상 등 180여 명이었지만 어느 한 명도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군사훈련 자체가 부족했고 싸우는 기술 또한 전문 병사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뒤처졌다.

전쟁에서 청송의병은 큰 피해를 보고 고전했다. 하지만 완고한 구국 의지로 뭉쳐진 청송의병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결국 일본군 10명을 사살하며 그들을 줄행랑치게 했다. 감은리전투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이곳 전투에서 만일 패했더라면 한반도의 중심부까지 일본군의 세가 뻗어나가 국운을 뒤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원일기

감은리전투에서 청송의병이 활약한 것이 지금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1995년 청송 심씨 문중에서 전해져 온 '적원일기'(赤猿日記)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 역사가 고증됐다. 적원일기는 전쟁 중 일어난 일들을 기술한 것으로 적원은 색으로 붉은색을 뜻하는 병(丙)과 원숭이를 뜻하는 신(申), 즉 병신년에 쓴 일기다.

적원일기는 당시 의병들의 출신 성분과 활동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어서 대부분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서술한 기존 진중일기와는 달랐다.

일기는 청송의병에 참여한 양반들의 이름과 그들이 병사를 훈련시키거나 운영하는 데 낸 운영자금 등이 기록돼 있었다. 일기를 보면 상시 근무병인 대장소 근무자 65명은 일일 1량을 받았고 각 지역에 파견된 병사 48명은 매월 이틀간 근무하면서 2량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청송의진이 꾸려질 때 초기에 3천량이 넘는 비용을 양반 출신이 모두 댔다고 일기는 기록했다.

당시 3천량은 한옥 몇 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 상당히 큰 금액이다. 적원일기를 통해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청송 주민들이 모두 하나 돼 구국에 동참했고 사회 지도층이 스스로 자비를 털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신창의 2주갑을 기념하는 함안 조씨

올해는 병신창의 2주갑 되는 해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까지 적원일기 등을 통해 청송의병 80명 등 115명을 공훈록에 등록했다. 의병만 봤을 때는 전국 시'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수가 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적원일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우리말 번역본까지 냈다.

14일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마을은 구국을 위해 몸바친 선조를 기리는 병신창의 2주갑(120년) 기념식을 한다. 이 마을은 생육신 조려(1420~1489)의 후손인 함안 조씨(咸安趙氏) 방호공파가 500년 넘게 뿌리를 틀고 살아온 곳이다.

1896년 5월 14일 이 마을에서 청송의병의 감은리전투가 일어났을 때 함안 조씨 후손들은 누구보다 구국을 위해 앞장섰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등록된 사람만 9명이며 적원일기 등을 통해 의병에 참여한 사람은 15명에 이른다. 한집안에서 이례적으로 많은 수가 의병에 참여한 것이다.

기념식을 준비한 함안 조씨 방호공파 하일댁 후손 조경래(66) 씨는 "선조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영원히 가슴에 담으려고 이번 기념식을 준비했고 앞으로도 매년 5월 14일 기념식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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