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설립한 대구고보 이전에 역사 태동…식민지 교육에 저항, 많은 애국지사 배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나와도 재주를 제대로 배울 수 없어서 애석하게 생각해온 지 오래다. 뜻을 같이하는 십여 명이 이를 개탄하고 학문을 일으킬 뜻을 모아 공금으로 만든 다음 개인 찬조를 얻어 수천 금을 모았다."
1899년 경상감영 관아 터에 세워진 달성학교 발기취지문의 일부다. 신문화를 받아들여서 국난을 극복하자는 대구지역 선각자들의 의식이 드러나 있다. 심상과와 고등과를 둔 4년제 달성학교는 지방관과 지역 유지가 함께 탄생시킨 첫 근대적 학교였다. 경상도관찰사가 학교장을 맡았고, 매년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도 받았다. 달성학교가 졸업생 서상일, 허억 등 애국지사를 배출한 것도 일제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는 건학이념과 맞닿은 것이었다.
이후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교육정책도 식민지화 과정에 맞게 개편한다, 달성학교의 심상과는 대구공립소학교로 인계하고, 고등과는 1907년에 개교한 협성학교에 흡수시켰다.
협성학교는 서상돈, 양기탁, 정재학 등이 국채보상운동 모금액 중에서 일부를 자금으로 설립한 학교다. 대구의 유림들이 설립에 참여했고 옛 대구향교의 명륜당을 빌려 교사로 사용했다.
조선총독부는 고등보통학교의 관제를 제정해, 협성학교를 관립대구고보에 병합시킨다. 1916년 4월 대구고보는 협성학교의 학생과 물품을 인수하는 한편, 신입생을 선발하여 개교했다.
이러한 과정은 경북고가 1899년에 설립된 달성학교와 여기서 전환된 협성학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비록 일제가 관립 대구고보를 설립했지만, 학교의 인적'물적 토대가 영남의 선각자'유림들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경북고가 거쳐온 역사적 흐름 속에는 민관이 힘을 합친 기반이 있었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대구 시민들의 국권 회복 열망도 함께 녹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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