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의 생각] 미련한 상상

입력 2016-04-27 19:21:02

얼마 전 제주를 다녀왔다. 48시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여행이었다. 출발 일주일 전에서야 예약하면서 입맛대로 항공권을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실 그리 오래 머물 생각도 없었다. 나들이보다 '위로 방문'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느닷없이 제주행을 선언한 후배 L이 잘살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됐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외국계 기업의 한국 대표를 지낸 L은 걱정과 달리 무척 행복해 보였다. 제주 시내에 임시로 마련한 그의 보금자리는 그다지 볼품은 없었지만 아늑했다. 서가에 꽂힌 이런저런 책들은 인생 2막 설계라는 제주살이의 목표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에 홀로 내려간 지 6개월 만에 나름 인맥도 생긴 모양이었다. 공항 마중에는 공짜로 빌렸다며 낡은 경차 한 대를 몰고 나타났다. 제주에 계속 살 것에 대비해 분양받아뒀다는 전원주택도 현지 지인의 추천으로 구입했다고 귀띔했다.

사실 L과 같은 제주 이주민은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 2월 제주 순유입 인구는 1천700여 명에 달해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월 단위로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 2014년 1만1천100여 명에 이어 작년에 1만4천200명 이상의 인구가 제주도로 옮겨왔다고 한다. 지난해 1만2천940명이 빠져나간 대구로서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물론 제주는 뭍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 L의 제주행에도 분명 다양한 취미생활이 한몫했을 테다. 그는 스킨스쿠버, 사진, 골프, 낚시, 오토바이 라이딩 등을 즐긴다. 물론 요즘 그의 수입원인 해외 주식선물 거래, 외환마진 거래에도 섬이란 지리적 특수성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제주 구석구석을 쏘다니는 동안 그와 나눈 수많은 이야기 중에 "외지인이 늘면서 '괸당 문화'가 약해지고 있다"는 경험담이 인상 깊었다. 제주 사투리로 혈족'친척을 뜻하는 '괸당'은 넓게는 혈연'학연'지연 등으로 얽힌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얼핏 대구와 유사해 보이는 문화다.

사실 대구나 제주나 좁은 '섬'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구야 대구가 훨씬 많지만 한두 다리만 건너면 거의 연결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구와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외지 출신 인사들이 대구 생활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도 바로 '끼리끼리 문화'다.

몇 해 전 고교 선배가 대구경북이 아닌 광역자치단체에서 정무직 부단체장을 지낸 일이 있다.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지만 솔직히 충격이 더 컸다. 인연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사를 고위직에 발탁하는 그 지역의 관용이 부러웠다.

대구경북 고향 까마귀가 아닌 인사를 부단체장에 발탁하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31년 만에 야당 국회의원도 뽑았으니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르잖아? 이별주에서 덜 깬 채 대구로 돌아오는 아침 첫 비행기에서 해본 미련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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