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 이태준의 '패강랭'과 사라진 기생

입력 2016-04-08 22:30:02

'선미인보감'(1918)에 실린 아홉 살 기생 이보배(오른쪽).

식민지 시기에 발행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이라는 책이 있다. '조선미인의 본보기를 살펴본다'는 의미를 책 제목으로 내걸기는 했지만, 막상 책을 펼치면 100여 명이 넘는 조선 기생들의 반신 사진이 열거되어 있다. 1918년 발행된 이 책의 발행자는 매일신보사 사장 '아오야나기 고타로'이며 발행기관은 '조선연구회'이다. 기생 사진과 이름, 나이, 특기 등이 기재되어 있어서 누구건 이 사진첩 하나로 조선 전역 기생의 얼굴은 물론, 특기가 무엇인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발행사는 풍속 교화와 기생의 기예 평가가 발행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상품 카탈로그를 연상시키는 책 구성을 볼 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듯하다. 책에 실린 기생의 나이는 평균 10대 중반이며, 연령은 아홉 살부터 서른 살까지 다양하다. 특기 역시 시조, 가사, 서도잡가, 검무, 붓글씨 등 제각각이다. 어린 티가 사진에서도 그대로 묻어나는 이보배라는 이름의 기생은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사, 시조, 서도잡가, 서양무도 3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특기를 가진 것으로 명시되어 있고, 열두 살의 조산월은 세 살이 더 많아서인지 서양 무도 2종이 추가되어 있다.

이들 어린 기생이 익힌 서양무용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통적 조선 기생이 전통적 조선문화와 멀어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18년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양무용뿐 아니라 일본 가요와 일본 샤미센 등 서양과 일본의 문화가 조선의 전통문화를 이미 침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준의 '패강랭'(浿江冷)(1938)은 '조선미인보감'이 나온 지 20년 후 조선 기생을 포함한 조선문화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패강이란 평양 대동강의 별칭으로 제목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대동강이 얼었다는 뜻이다.

소설은 주인공 '현'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십 수 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평양은 이미 근대화되어 예전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이다. 봄이면 기생과 양반이 풍류놀이를 하던 대동강 상류 을밀대 부근에는 비행장이 들어서 있다. 평양 여인이 전통적으로 두르던 머릿수건과 댕기는 생활 개선을 위해 사라졌고, 현을 따르던 기생 영월이는 조선 전통무용 대신 서양 댄스를 즐겨 춘다. 겨울바람에 대동강이 얼어붙듯, 평양을 흐르던 긴 전통의 물결 역시 일제의 식민 정책과 더불어 어느 순간엔가 정지되어 버린 것이다. 아홉 살 기생 이보배가 조선전통 음악과 무용에 이어, 서양 춤을 기예로 익히던 1918년부터 이런 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식민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지배와 복종의 단순한 경험을 넘어 보다 더 근본적인 상실의 경험을 의미한다. 식민지가 끝난 지 이미 70년이 지났다. 식민지 시기가 끝난 후, 그나마 살아남았던 전통적 문화가 전후 근대화, 그리고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한 글로벌화 열풍을 만나 이제는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들 대부분은 크리스마스는 기억하지만 창포물에 머리를 감던 오월 단오의 전통 명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한 번쯤 돌이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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