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단종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기로 한 수양대군은 모든 계획을 한명회에게 맡긴다. 전권을 위임받은 한명회는 1453년 계유정난 당시 살생부(殺生簿)를 만들었다. 이름대로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가르는 명부였다. 적으로 판단해 죽일 자, 적이지만 설득해 우리 편으로 쓸 수 있는 자의 이름을 담았다.
네 편이냐 내 편이냐에 따라 생사가 갈렸다. 네 편이던 좌의정 김종서는 집에서 철퇴로 참살됐다. 영의정 황보인과 이조판서 조극관 역시 네 편이었다. 궁문 뒤에 숨어 있던 무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신숙주 등 생부에 포함된 인사들은 내 편이었다. 목숨을 건졌다. 그뿐만 아니라 수양대군 아래 승승장구했다. 한명회의 살생부는 네 편에게는 북망산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내 편에는 출세 가도였다.
15세기 살생부가 21세기 정치판에 부활했다. 선거철만 되면 단골 메뉴처럼 '살생부'가 나돌아다닌다.
공천을 앞두고 새누리당 내 친박계와 김무성계가 공천 살생부 존재 여부를 두고 단단히 붙었다. 여권 내 '현역 40명 살생부'를 둘러싼 파문이 불을 질렀다. 정두언 의원이 "김 대표의 측근이 '김 대표가 친박 핵심으로부터 현역 의원 40여 명의 물갈이 요구 명단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언론에 흘린 것이 시작이다. 그 명단에는 정 의원 자신과 유승민, 이재오 의원 등은 물론 일부 친박계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무성 대표는 "그런 요구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자 친박 측은 김 대표의 자작극이라며 공세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역시 '공천 살생부가 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당 공식기구의 철저한 조사를 요청'하며 발끈하고 있다. 김태흠 의원은 김 대표를 향해 "측근을 통해 (살생부가 있는 것처럼) 흘려 나가고 본인은 모른다고 한다"고 자극했다. 친박계와 비박계가 이전투구 양상이다.
살생부가 실제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길 없다. 분명한 점은 정치권에 네 편, 내 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한편에선 '살생부'까지 들먹이며 반발하고, 한편에선 부인하며 각을 세운다. 이는 차기 대선 구도로까지 연결돼 있다.
궁금한 것은 왜 공천 여부에 살생부라는 끔찍한 이름이 붙었을까다. 국회의원 자리에 생명처럼 끔찍하게 여길 그 무엇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국회로 가는 관문인 공천 여부에 죽자 살자 나설 일이 없을 터이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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