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에 해 진다 하니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진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이 칼럼에서 가끔씩 소개하는 문학 작품들은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에 많이 나오는 것들이다.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퇴계 이황 선생과 동시대에 살면서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쓴 시조이다. 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한겨울인 삼동에도 얇은 베옷을 입고, (집도 없이) 바위 구멍에서 눈비 맞으며 살면서 구름을 통과해서 오는 (간접적인) 햇볕도 쬔 적이 없지만, 해가 진다고 하니까 눈물겹다는 내용이다. 그냥 읽으면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해'를 '임금'으로 대입을 해서 보면 해석의 실마리가 풀린다. 초장에서 이야기하는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는다는 것은 실제로 화자가 노숙자처럼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것에 대한 일종의 수사적 표현이다.(실제로 남명 선생의 집안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벼슬도 하지 않았고,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일도 없지만, 임금이 죽었다고 하니까 눈물겹다는 것이다.
이 시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도대체 어떤 임금이기에 아무런 은혜를 입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가 눈물겨워할까를 물으면 학생들은 대부분 세종대왕이라고 대답을 한다.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성종이나 정조와 같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임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답은 바로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 세력들에 의해 추대된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다. 중종 시대라고 하면 드라마 '여인천하'에 나왔던 것처럼 윤원형, 정난정과 같은 무리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가 권력 암투를 벌이며 '주초위왕 사건', '작서의 변' 등으로 어지러웠던 시절로 기억이 된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중종은 귀가 얇아 간신들의 말에 쉽게 혹하고, 분노조절장애에 가까운 행동을 보여주거나, 드라마 '대장금'에서처럼 "맛있구나"라는 말밖에 못 하는 미식가의 모습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중종은 조광조와 같은 신진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연산군 시대에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개혁 군주였었다. 재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이나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훈구파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개혁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입바른 소리만을 하며 개혁을 압박하는 신진 사림들에게 염증을 느낀 중종은 점점 간신배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기묘사화를 통해 사림을 숙청하게 된다. 개혁의 동력이 떨어진 중종 집권 후반기는 끊임없는 권력 다툼과 삼포왜란, 여진족의 침입 등으로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점점 나라가 쇠퇴해 가게 된다.
남명 선생도 중종 초에는 벼슬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혼탁해져 가는 중앙 정치를 보면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을 닦는 데 전념을 하게 된다. 중앙 정계에서 떨어져서 그 모든 과정과 중종의 죽음을 지켜본 선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시조의 종장에 있는 '눈물겨워 하노라'는 단순히 어진 임금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주 우리는 또 한 분의 대통령을 역사 속으로 보냈다. '군정 종식'을 외치며 독재와 싸웠으며, 수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한 사람, 그렇지만 IMF로 기억되는 대통령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도 중종을 보내는 남명 선생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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