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악연(惡緣)

입력 2015-11-28 01:00:42

거록대전(巨鹿大戰)은 시황제가 건설한 진(秦) 제국 멸망에 분수령을 이루며 항우(項羽)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이때 항우가 이끄는 반군과 맞서다 괴멸당한 진나라 주력부대의 장군이 왕리였는데, 그의 조부는 시황제의 통일전쟁 당시 대장군으로 초나라군을 격파하며 초나라의 마지막 장수 항연을 죽인 인물이다. 그런데 항연이 바로 항우의 조부였던 것이다.

항우는 진 제국을 와해시키는 회심의 일격을 가하며 조국과 집안의 원수를 갚지만, 초한(楚漢) 쟁패전에서 유방(劉邦)이라는 새로운 악연을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다. 조선 초 계유정난을 통해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과 그에 의해 척살된 김종서도 악연이다.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권신이었던 김종서 또한 수양대군의 야심을 견제했지만, 선수를 빼앗긴 채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멸문의 화를 당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의 책사였던 한명회와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도 그렇다. 성삼문은 쿠데타로 등극한 세조와 한명회를 창덕궁 연회장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한명회로 인해 사육신이 모두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 이 또한 대척점에서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인연의 결과가 아닐까. 그렇게 성삼문은 만고의 충신이자 조선 선비의 표상으로, 수양대군은 패륜의 오명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오욕으로 물들게 한 왕으로 남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해 눈길을 끌었다. 12'12 쿠데타에 따른 가택연금과 단식투쟁 그리고 민주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단행된 하나회 척결과 전직 대통령 단죄 등 '35년 악연'으로 점철된 인물 간의 유명을 달리한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먼저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동지'이자 '정적'의 관계이기도 했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받는 사마천은 '사기'에 인물을 기록할 때 현실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어떤 정신과 의지로 살았는지를 더 중요시했다. 부귀영화를 탐한 삶일수록 그 어두운 그림자가 후세에 오롯이 남기 마련이다. 그뿐인가. 일생 동안 지은 악연 또한 저승 갈 때 고스란히 지고 가야 할 업보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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