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의 새論새評] 법학자가 본 YS식 정치

입력 2015-11-26 01:00:05

1957년생. 중졸검정고시. 서울공고·경희대 법대·미국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졸업. 미 연방 변호사. 현 KBS1 라디오 공감토론 진행자
1957년생. 중졸검정고시. 서울공고·경희대 법대·미국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졸업. 미 연방 변호사. 현 KBS1 라디오 공감토론 진행자

공직자 재산공개·금융실명제 강행

정의에 충실했던 YS식 '직관 정치'

비난·조롱 가득한 작금의 정치인들

어려운 일 쉽게 풀어낼 각오 다지길

"김영삼 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 김대중(DJ), 김영삼(YS) 두 전직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이 서로 상대를 평한 말이다. YS는 직관과 감각, DJ는 논리와 이성의 정치인임을 간파한 것이다. 이처럼 YS는 사안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또한 이를 단순한 언어로 명료하게 압축해 낸 빼어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 '40대 기수론'은 당시 정치권의 세대 교체 필요성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엄혹한 시절, 이 말을 들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민주화의 시대가 반드시 열릴 것이라는 소망이 저절로 생기게 한 비전의 언어였다. 역시 설명이 필요 없다. 민주화 투사가 군사독재의 후예들과 손을 잡은 밀실야합이라고 비난받은 3당 합당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일축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의 업적들은 결과론적으로 결국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취임 이틀 만인 1993년 2월 27일 YS는 새 정부의 첫 국무회의서 재산 17억7천822만원을 공개해 버린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강제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었지만 대통령이 재산을 공개한 마당에 이를 거부할 공직자가 있을 리 없다. 이른바 '재산공개 파동'으로 고위직 인사들이 자진 사퇴한 경우도 있지만 해임된 경우도 다수 있다. 물론 법적 근거가 희박한 조치였다. 이처럼 YS식 직관의 정치는 법학을 하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아침에 수십 개의 별을 떨어뜨린 하나회 숙청 같은 경우는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권한이라 치자. 말 그대로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 법률이 아닌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상 대통령은 내우'외환'천재지변 등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가 있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갖는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할 수 있다. 엄격히 따지면 당시는 이런 위기 상황이거나 국회의 집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명분으로 12'12 군사반란 등을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군사반란 등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었거나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이 헌정사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이상 처벌이 어렵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유명한(?) 의견도 그런 맥락이다. 입법을 강행하고 결국 두 사람을 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입법 금지라는 헌법상 대원칙을 거스른 결과였다. 만약 법을 얘기하고 장단점을 따지며 결단을 머뭇거렸다면 어땠을까.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군부의 정치 개입 근절 등 우리 사회를 엄청나게 진전시킨 여러 조치는 아직도 요원한 일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문자를 넘는 법의 정신, 즉 정의의 요청에 충실했던 정치가 YS식 직관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YS를 생각하며 작금의 정치권을 바라보면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꼬일 대로 꼬인 정치권의 문제를 속 시원히 풀어내는 큰 정치 혹은 정치인이 없다. 우리나라에 닥친 사면초가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가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 어둠이 깊어가건만 정치인 모두가 모르쇠로 제 앞길 도모에만 바쁘다. '어둠이 깊으면 반드시 새벽이 온다'고 비전의 언어로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정치인도 사라졌다. 입만 열면 상대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빈틈만 노리는 자잘한 정치인들로 가득하다. 오늘 영결식이 거행되는 YS 국가장 장례위원회 명단을 보니 어지간한 정치인은 다 들어가 있다. YS를 추억하며 이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부디 모든 정치인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가는 정치, 큰 정치를 할 각오를 다지길 바랄 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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