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선산 발 닿는 곳마다 길재의 숨결 느껴지는 듯…
길재의 회고가처럼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회고가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원천석(1330~?)은 길재보다 스물세 살이나 많았지만 길재와 뜻을 같이했던 몇 안 되는 벗 중의 하나이다. 고려 말기에 진사 벼슬을 하고 정세가 혼란스럽자 이를 개탄하고 길재처럼 고향인 원주의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그의 호에 '김매다'는 뜻의 운(耘)이 들어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조선 왕조에 동참하지 않고 은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길재만큼 이방원과 가까워 이방원이 스승으로 모신 인물이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여러 차례 원천석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은 스승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지 이후에 친히 원천석을 만나러 원주로 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채 벼슬하지 않겠다는 전갈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원천석의 회고가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라는 애상적인 가락을 통해 현실에서 느끼는 비감함을 그렸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길재의 출생지인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는 길재가 어릴 적 놀던 남계천과 여덟 살 때 가재를 잡았다가 놓아줬다는 방오지가 있으며 그해에 길재가 근처 바위에 썼다는 곡구(谷口)라는 글자가 새겨져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길재의 생가터를 나타내는 유허비도 있다. 이곳에는 또 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이 있다. 이 마을에서 난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1795년(정조 19년)에 선산 부사 이채가 건립한 것이다. 충신은 길재이며 효자는 배숙기(裵淑綺), 열녀는 약가(藥哥)이다.
약가는 길재와 동시대의 인물로 군역 나간 남편이 몇 년이 지나 집에 돌아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자 낮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남편인 줄은 알지만 한밤중에 집에 들이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신이 수절한 뜻을 잃게 한다는 이유를 댔다. 그 남편이 하는 수 없이 다음날 낮에 찾아와 부부가 마침내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약가는 남편에게 일단 돌아가라고 하면서 길 선생께서 들으신다면 어떻게 여기시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길재의 곧고 바른 생활과 깊은 학문이 마을의 부녀자들도 감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길재는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교육에 나서는 등 애민 사상이 강했으며 그를 기리는 시구에 '밥 짓는 계집종들도 시(詩)로써 서로 다투었나니'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의 교육은 풍속을 교화시켰다.
배숙기는 1470년(성종 1년)에 진사를 거쳐 문과에 등제하여 홍문관 저작의 벼슬을 한 인물로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성격이 온순하여 부모의 뜻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다고 한다. 부모에게 좋은 음식을 드리고 외출하여 늦게 돌아와 양친이 잠을 자면 밖에서 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안을 드리곤 했다.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부모에게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불욕을 실천하였으며 부모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울면서 간하여 잘 판단하도록 하였다. 길재 역시 배숙기 못지않은 효자였다. 이곳에는 '백세청풍 팔년고등'(百世淸風 八年孤燈)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금오산에는 정상 부근에 길재가 낙향 초기에 살았던 곳으로 전해지는 대혈동(大穴洞)이 있고 산 중턱에는 길재가 명상을 하고 공부한 곳으로 전해지는 야은굴(도선굴)이 있다. 금오산 아래에는 길재가 중국 고대의 충신 백이와 숙제처럼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던 것을 기리는 채미정(採薇亭)이 있고 부근에 길재의 후학들이 학문을 논하던 공간인 구인재(求仁齋), 유허비각 등이 있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영조 44년)에 창건됐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돼 있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에 감동한 숙종의 어필 오언구(五言句)가 새겨져 있는 경모각과 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숙종이 어필을 내리자 당시 정승, 관료들이 어필 뒤편에 글을 지어 올렸는데 이 유물은 구미시립민속관에 보관돼 있다. 시구에 나오는 엄자릉은 중국 후한 때 인물 엄광(자는 자릉)이며 엄광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죽마고우 유수를 도와 군사를 일으켰으나 유수가 왕망을 멸하고 스스로 후한의 황제(광무제)가 되는 것을 보고 의롭지 못한 일이라 여겨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금오산 기슭에 돌아와 누워 있으니(歸臥烏山下)
그 맑은 기풍 엄자릉에 견줄 만하네(淸風比子陵)
성주께서 그 아름다운 뜻 이루게 하심은(聖主成其美)
사람들에게 절의 일으킴을 권하려 함이네(勸人節義興)
구미시 오태동에는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와 길재의 묘소, 청풍재(淸風齋), 오산서원 터 등이 있다. 지주중류비는 1587년(선조 20년)에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1539~1601)이 중국의 명필 양청전(楊晴川)이 쓴 '지주중류' 네 글자를 모사하여 세운 비이다. '지주'는 중국의 황하 가운데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돌산으로, 흘러가는 물속에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데 절개를 굳게 지킨 길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뒷면에는 류운룡의 동생인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손들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비문이 닳아서 읽을 수 없게 되자 1780년(정조 4년)에 다시 세웠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머릿돌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류운룡은 당시 인동 현감으로 있으면서 지방 유림들과 뜻을 모아 지주중류비는 물론 그보다 2년 앞서 길재의 묘 아래에 길재의 충절과 학행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추진, 3년여의 공사 끝에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세웠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기관 역할을 했으나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청풍재는 오산서원을 건립할 때 함께 세워진 길재의 묘재(墓齋)로 서원은 없어졌지만, 청풍재는 보존돼 남아 있다.
구미시 선산읍 원동의 남산(藍山) 아래에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이 있다. 1545년(명종 22년)에 최응룡, 김취문이 길재를 기리기 위해 주창하여 1570년(선조 3년)에 금오산 아래에 건립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년)에 선산 부사 김용(金涌)과 지방 사림들이 서원 자리가 너무 외딴곳에 있어 관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서원에는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을 추가로 배향하여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셔왔다. 경내에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상현묘(尙賢廟)와 동재(東齋)'서재(西齋)'정학당(正學堂)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은 47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1985년에 경상북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구미시 도량동은 길재가 낙향해 살던 곳으로 이 동네에는 야은초등학교가 있고 야은로라는 명칭의 도로가 있다. 도량동 율리(밤실마을)에는 구미 삼성전자가 후원해 그린 벽화가 있고 특히 도산초등학교에는 길재의 일생을 벽화로 그려 조성해 놓았다. 율리 마을에는 야은 사당과 재실도 있고 이 주변에 길재가 심은 대나무밭이 있는데 이를 '야은죽'이라고 한다.
길재의 처가가 있던 충남 금산에도 길재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길재와 관련된 유적 역시 여러 군데가 있다. 길재는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살고 있던 신씨 가문의 딸과 혼례를 올렸으며 길재의 증손자가 이 마을에 정착해 후손이 번성하면서 이 마을은 해평 길씨 집성촌이 됐다. 원래 마을 이름이 '부리리'(富利里)였으나 길재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을 기려 '불이리'(不二里)로 바꿨고 선조의 영향을 받아 효자, 열녀가 많이 나온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에는 길재를 기리는 사당인 청풍사(淸風祠)가 있으며 1678년(숙종 4년)에 지방 유림들이 길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청풍서원이 있다. 청풍서원은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9년에 금산군이 주도해 복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편액이 있으며 서원 경내에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지주중류비 등이 있다.
구미의 해평 길씨 문중은 야은문집 목판과 야은문집, 2009년 무렵 새로 발견한 길재의 영정 등을 보관하고 있다. 해평 길씨 문중과 선산 김씨, 일선 김씨, 인동 장씨 등 구미'선산의 14개 문중은 길재 등 구미'선산 출신의 성현들을 기리기 위해 오랫동안 강론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한때 끊어졌다가 1994년에 재개돼 그 역사가 380여 년에 이른다. 길씨 문중 후손들은 매년 음력 4월 12일 야은 길재의 제사를 지낸 후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구미시는 야은 길재를 기리기 위해 금오산 밑 금오정 부근에 '야은 기념관'이라 할 수 있는 역사문화디지털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다. 214억원 규모의 예산을 들여 2016년 3월쯤 착공, 2017년 말까지 길재의 발자취와 성리학의 역사, 길재의 사상과 교육 등을 담은 전시관 등을 갖추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충절의 대표적 인물인 길재가 구미 출신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면서 길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도움말: 길화수 (사)금오서원보존회 부이사장(야은 길재 17대 종가손)
이택용 경북정체성포럼 선비분과위원(고전문학 연구가)
김석배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박인호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참고 자료:야은 길재의 학문과 사상(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소 발간)
조선 선비의 길을 열고 숲을 이루다(한상우 한국교원대 교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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