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집의 기둥 아래는 든든한 주춧돌이 있다. 대구에서 수많은 인재가 나왔다. 그러나 그 인재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은 조용한 다수의 보통사람이다. 팔공산 암자의 머슴, 종합운동장의 뻘찌 아저씨 그리고 달성공원의 거인 등 이런 든든한 일꾼들이 대구를 빛나게 한 숨은 일꾼들이다.
높은 산 암자에 가서 도를 닦는 사람들을 본다. 그때마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는 말처럼 기껏 힘들게 절에 가서 해탈의 도는 생각하지 않고 엉뚱한 걱정을 한다. 저 도사님도 사람일진대 반드시 밥은 먹고 배설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먹는 쌀과 반찬은 누가 갖다주는지 또 그 배설물은 어디에 모으고 또 누가 치우는 것일까? 그것이 늘 궁금하다.
몇 년 전 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을 등산할 때였다. 스님 두 분이 시내서 장 본 물건을 산 아래까지 들고 오니 후줄근한 차림새의 사내가 지게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부린 두 스님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에 올라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산을 오르고 짐을 진 절간의 머슴 또한 가쁜 숨을 내쉬며 산을 올랐다. 그 사내는 오랫동안 단련한 덕인지 무거운 짐을 지고도 나와 같은 속도로 암자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두 스님은 웃통을 벗어젖히고 툇마루에서 참외를 깎아 먹고 있었다. 서로 웃고 떠들던 스님들이 머슴을 보자 표정이 갑작스레 변하며 노기를 띤 목소리로 꾸중하기 시작했다.
머슴이 너무 늦게 절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오지 않고 농땡이 부리고 왔다고 화를 낸다.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올라온 증인이라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노지심을 닮은 그 스님들의 외모가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암자를 빠져나왔다. 그 머슴은 건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도 부지런히 산을 올라 나와 같은 시각에 암자에 도착했다. 그래도 스님들의 계산에는 늦었던 모양이다. 스님들이 원하는 시각에 도착하려면 축지법을 써야 하는데 하근기(下根機)인 머슴이 그럴 능력은 없다. 도가 모자라면 잘 먹여 기운이 펄펄 나게 해주어야 상전이 원하는 대로 부려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스님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꾸중만 한다. 나는 '비 맞은 중'처럼 불만을 혼자 중얼거리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대구시민운동장이 종합운동장이라 불리던 시절 거기에서는 온갖 운동 시합이 있었고 다양한 행사도 열렸다. 임시로 만든 특설 링에서는 레슬링이나 권투 시합도 열렸다. 운동장에서는 야구, 축구 그리고 농구도 했다. 학생들과 시민이 동원돼 정부 고관의 훈시도 듣고 멸공을 외치는 대회도 열렸다. 문자 그대로 종합운동장이었다. 이 무렵에는 여자들은 어떤 경기라도 전부 무료로 입장을 시켜주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어린이라도 입장료를 받았다.
시내의 악동들은 돈이 없었지만, 모험심이 발동해 종합운동장을 몰래 입장하는 등 또래들이 우러러볼만한 행동을 자주 했다. 이 무렵 청소년의 모험이란 '닷지 먹는다'고 해서 극장에 돈 안 내고 후미진 창문으로 들어가기, 가설극장 천막 찢고 몰래 들어가기, 중국집 음식 먹고 뒷문으로 도망가기 등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적인 행동이 많았다. 당시 종합운동장은 둘레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개울은 옛날 성에서 적을 막던 해자와 같은 역할을 해 몰래 운동장에 들어가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 여러 명이 횡으로 줄을 서서 동시에 물을 건너는 방법을 썼다. 소위 말하는 '독고다이'식 돌격이었다. 애들의 이런 공격이 있으면 당시에 '종합운동장 뻘찌'라는 아저씨가 긴 대나무 장대로 물을 건너는 녀석들을 후려쳐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재수 없는 몇몇은 '뻘찌 아저씨'의 대나무 장대 세례를 받으면서 상륙을 시도하고 더 재수 없는 놈은 아예 포로가 되어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서 훈방되었다. 그러나 이들 소수의 불행 덕에 많은 아이는 행운을 얻어 둑을 기어올라 구경꾼 틈 속으로 섞여 들어가게 된다. 뻘찌 아저씨는 그 많은 불법 도강 꾼을 막느라 혼자서 종일 무거운 장대를 휘두르며 고생했다. 악당 아닌 악당 노릇을 한 뻘찌 아저씨, 그는 우리의 악마이면서도 또한 신나는 친구였다. 이런 '장대 든 정의의 사도' 덕에 철없는 아이들은 공공시설은 함부로 월장(越墻)하는 곳이 아니라는 질서 개념이 형성돼 있었다.
이 무렵 달성공원에도 정의를 수호하는 또 한 사내가 있었다. '달성공원 거인'이다. 해방 뒤 한동안 달성공원은 나무도 없이 헐벗은 데다 후미진 곳은 동네 공용화장실이며 돈 없는 연인의 모텔 노릇을 하고 있어 말이 공원이지 골치 아픈 흙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늦은 귀갓길이나 이른 아침 산책객에게 달성공원은 배설물로 더럽고 남녀의 야한 풍경 때문에 차마 함부로 찾아갈 곳이 되지 못했다. 1971년부터 대구시청에서 달성공원을 유료입장으로 바꾸었다. 돈을 받으니 문지기가 필요했다. 시청에서는 공짜 손님도 못 들어오게 하고 고객 유치도 할 겸 거인을 고용했다. 이 사람은 몸집도 컸지만, 의상을 조선시대 군인 복장을 하고 긴 창을 들고 서 있었으니 멋있게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공원 가기보다 그 거인을 보러 달성공원에 가기도 했다. 이 거인이 문을 지키고부터는 공원이 더는 화장실 노릇, 모텔 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서울 가면 서양에서 배워온 문지기 교대행사라고 해서 대한문 앞에서 국적불명의 생쇼를 하고 있다. 청년들에게 조선시대 장군을 연상케 하는 옷을 입혀 나발을 불며 거창한 교대식을 하고 있다. 멋모르는 외국인들은 조선조 때 정말로 병사들이 그런 복장을 입고 그 의식을 한 줄 알고 '뷰티풀'을 외치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런 면에서 대구는 정말 앞서 가는 도시이다. 1960, 70년대 이미 조선시대 장군 옷을 입은 남자를 옛 달성 앞에서 파수를 보게 했으니 말이다. 대구 사람들 참 머리가 좋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또 한 사람의 거인을 고용해 아악을 연주하며 교대식까지 했더라면 많은 관광객이 대구를 찾았을 것이고 지금도 계속됐을 것이다. 경기 여주 출생이며 키가 225㎝였던 유기성 씨. 지금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이 든 축은 달성공원 거인으로 그를 기억한다. 사람 좋던 아저씨는 30년을 그렇게 봉사하고 1999년 대구를 영원히 떠나 지금은 하늘에서 대구를 지켜주고 있다.
좋은 집의 기둥 아래는 든든한 주춧돌이 있다. 대구에서 수많은 인재가 나왔다. 그러나 그 인재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은 조용한 다수의 보통사람이다. 팔공산 암자의 머슴, 종합운동장의 뻘찌 아저씨 그리고 달성공원의 거인 등 이런 든든한 일꾼들이 대구를 빛나게 한 숨은 일꾼들이다. 지금은 너도나도 앞장서 빛을 내려고만 하고 음지에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 기초가 없어지니 우리의 집이 항상 흔들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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