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상형(喪兄)

입력 2015-11-14 02:00:04

박지형 문화칼럼니스트
박지형 문화칼럼니스트

사람은 언제 죽는가? 의학적으로는 보통 심장이 불가역적으로 정지되었을 때, 혹은 호흡이 영구적으로 정지되었을 때 사망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뇌사설도 있다. 이 경우 뇌 기능이 상실되더라도 호흡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어 위의 사망 판정과는 배치되는 면이 있다.

종교에서의 해석은 다양하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은 죽지 않는다. 천국에 가든, 연옥 혹은 지옥에 가든 영혼의 삶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봐야 한다. 힌두교, 도교, 토속신앙 등과 온통 섞여 버렸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죽은 뒤 49일 후에 영혼조차 이승을 떠난다는 설이다.

인문학에서 인간은 더러 반영구적으로 산다. 영국의 시인 셰익스피어는 살아생전 이런 시를 남겼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눈을 뜨고 있는 한, 이 시는 읽힐 것이고 (내 사랑) 당신은 이 시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오." 셰익스피어의 이 선언은 오만방자했지만 그는 그럴 만한 재능이 있었고, 과연 그 시구는 현실이 되었다. 그의 연인이든 그가 창조한 캐릭터이든, 그들은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햄릿과 코딜리아는 귀기 어린 분장하에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지 않던가?

내 경박에 무협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남칠괴는 장아생이 죽었지만 여전히 강남칠괴로 불렸다. 무당칠협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암이 불구가 되고 막성곡이 죽었어도 그들은 영원히 무당육협 혹은 무당오협이 아닌 무당칠협이었다.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혈연이든 의형제이든 그것이 맺어지는 순간, 그들은 한날한시에 죽는 것으로 의미되어진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형제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여전히 온전한 일곱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강호를 누빈다. 관우와 장비는 그래서 기실 백제성에서 죽었다. 험준한 서촉의 영토와 남은 연의의 페이지를 남겨둔 채, 그때야 유비와 함께.

내 아내는 2주째 울고 있다. 참한 언니를 돌연 잃었기 때문이다. 남겨진 처형도, 셋이나 되는 처제들도 같은 기간을 연달아 울고 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는 말이 그대로다. 46살의 한창 고운 분을 떠나보냈으니 그야말로 참상인 것이다.

같잖은 위로로 마무리해 보자. 나는 역시 무협지 식의 세계관이 좋다. 인간의 종언은 그가 남긴 모든 의미가 사라질 때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확신하건대 언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가난을 헤치고 동생들의 길을 내어 주었던 맏이의 늠름함과, 막내의 결혼식 날 분홍 저고리를 입고 지었던 전성기의 미소를, 대체 어떤 불로 태워 바술 수 있단 말인가. 또 병문안을 간 제부 앞에서 끝내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명가의 자태에서, 마지막 소녀로 돌아간 날 맡고 싶다던 그 꽃향기의 순수까지, 우리 안에 돌아설수록 더 생생한 기억을 어떤 무게의 석판으로 감히 덮을 수 있나.

피로 맺어진 자매들, 당신들이 모두 죽기 전에는 그 사람, 그 그리운 사람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러니 여협들, 장지를 떨치고 일어나 이제 언니가 남긴 영토와 남은 페이지들을 수호해 나가기 바란다. 그녀가 아픈 바늘 다 뽑고, 반듯이 일어서 앉아 궁금했던 가족의 다음 날들을 바라볼 수 있게. 그 무겁던 인생의 도검들을 다 내려놓은 채, 또 오래도록 사뿐사뿐 이 강호를 소요(逍遙)할 수 있도록.

※박지형: 경북대 고고인류학과·경북대 대학원 영문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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