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찾아 떠나는 유학
한국 최초의 화가 나혜석. 시대를 뛰어넘는 기행과 파격 행보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화단에 남긴 자취 또한 컸다. 초기 페미니즘에 몰입해있던 그가 예술적 한계에 부딪히자(불행한 개인사도 있었지만) 선택한 것은 구미(歐美) 여행이었다. 얼마 전 타계한 화가 천경자도 베트남 종군화가를 자청했을 정도로 예술적 행보에 적극적이었다. 이혼과 가정불화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파구로 세계 일주를 택했다.
다 내려놓고 떠나는 일, 비교적 거취가 자유로운 예술가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두 화가처럼 운명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지만 화가 신수원(37)도 요즘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신 씨가 지역 화단에 명함을 내민 지 10년. 그동안 모두 10여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전시회가 거듭될수록 화단에서의 지명도는 올라갔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스스로 더 이상 내려설 곳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신 씨가 선택한 것은 유학이었다. 유학하면 일부 부유층들의 호사 행보를 떠올리지만 신 씨의 경우는 좀 다르다. 혼자 길을 떠나야 하는 탓에 가족과 긴 이별을 감수해야 한다. 그에게 가족들의 배려와 격려는 가장 큰 힘이 되었기에 서로에게 공백은 크게 다가온다.
지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도전이라고 격려하지만, 자신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비행(非行)이라고 비하한다. '도전'과 '비행' 사이에서 새로운 '스케치'를 준비하고 있는 신 화가를 작업실에서 만나 보았다.
◆'유년 시리즈' 끝난 후 깊은 좌절감
피카소는 화가의 창작 활동을 '일종의 일기를 쓰는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일기장에 그날의 강렬한 인상을 기록하듯 화가의 캔버스에도 당시의 가장 절실한 고민, 화두가 옮겨진다.
신 씨는 2006년부터 모두 13차례에 걸쳐 개인전, 초대전을 가졌다. 전시회마다 테마를 직접 정했고 주제에 맞춰 모든 작업을 진행해왔다. 몇 번 콘셉트를 벗어난 적이 있지만 신 씨의 화제(畵題)는 유년시절의 기억에 닿아 있다.
"'이브의 집'(2010), '봄의 로망스'(2013), 'The Father'(2014) 전이 모두 저의 유년시절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제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서 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아에 대한 고충을 숙제하듯 풀어냈어요."
신 씨의 유년시절에 대한 긴 여정은 작년에 일단락되었다. 무엇엔가 쫓기듯 붓을 잡은 지 8년 만이었다. 막상 자전적 연작(連作) 시리즈를 화폭으로 풀어내고 보니 자신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다시 한 번 자기 점검이 필요했다. 그 반성과 후회를 올해 '我+실현' 전에 담았다.
숙제 같았던 연작 스토리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후유증도 만만찮았다. 우선 몸 안의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듯한 허탈감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유년의 기억을 정리하고 나면 현재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구상이 열리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이젠 새 화두를 잡아야 하는데 도대체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어요.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 처방으로 유학을 떠올린 거죠."
◆화려한 원색은 유년의 추억들
'색을 쓸 줄 아는 화가'. 화단에서 신 씨를 평가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닉네임이다. 캔버스에 뿌려진 화려한 원색은 고흐와 고갱의 인상주의 화풍을 연상케 한다.
신 씨의 이런 과감한 색은 소녀 시절의 기억에서 근원 한다. 신 씨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주의 오릉(五陵) 근처 산골마을. 눈을 뜨면 노란 들꽃이 카펫처럼 펼쳐지고 창을 열면 산등성이 실루엣이 시선을 간질이는 목가적 마을이었다.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은 삼 남매의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산골의 사계절은 말 그대로 색의 향연이었어요. 철마다 각기 다른 색으로 펼쳐지는 자연은 말 그대로 거대한 캔버스였죠."
신 씨는 작업 때마다 가장 순수하고 맑았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억의 조각들을 화폭에 옮겼다.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원색들도 이런 정제과정이 있었기에 부담없이 화폭에 녹여낼 수 있었다.
과감한 색의 차용(借用)의 모티브는 또 있다. 바로 옆집에 살던 화가 아저씨였다. 단 두 채뿐인 외딴 마을에서 화가의 작업실은 신 씨의 놀이터였다.
"당시에 아저씨는 무속인을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색채가 무척 강렬했습니다. 그런데도 무녀의 섬뜩한 눈빛이며 무구(巫具)들이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그 색깔들이 제 기억 속에 편린으로 자리 잡은 거 같아요."
◆프랑스에서 백지상태로 출발할 것
신 씨는 개인전, 초대전을 포함해 이제까지 총 100회 이상의 전시회를 가졌다. 10년 동안 화가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이력이었다. 바쁜 중에도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기꺼이 '나눔의 붓'을 펼쳤다.
작년 대구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자선전을 요청받았을 때 기꺼이 전시회를 열었다. 작년 12월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를 공연할 때 콜라보를 제안 받고 망설임 없이 재능기부를 했다.
이제 신 씨는 내년 초 화단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소르본느로 떠난다. 프랑스에 가면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리셋하고 백지상태에서 자신을 채워갈 것이다.
나혜석, 천경자가 외유를 통해 작품세계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 한 사조(思潮)를 이루었던 것처럼 신 씨도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과정이고요. 2년을 20년처럼 압축해서 살 거예요. 틈틈이 여행도 다니고 1년에 한 번씩 개인전도 할 겁니다. 많은 변화를 시도하겠지만 저의 일생의 가치인 초현실주의와 '소통의 수단으로서의 그림' 원칙은 평생 화두로 지켜갈 생각입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