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通] 새로운 도전 준비하는 젊은 화가 신수원 씨

입력 2015-11-14 02:00:04

자아를 찾아 떠나는 유학

" '유년의 기억' 시리즈를 끝내고 난 후 스토리를 완성했다는 안도감보다 저의 예술적 한계가 드러났다는 자괴감이 더 컸어요. 이제 그 돌파구로 먼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내년 초 재충전을 위한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신수원 화가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보았다.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한국 최초의 화가 나혜석. 시대를 뛰어넘는 기행과 파격 행보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화단에 남긴 자취 또한 컸다. 초기 페미니즘에 몰입해있던 그가 예술적 한계에 부딪히자(불행한 개인사도 있었지만) 선택한 것은 구미(歐美) 여행이었다. 얼마 전 타계한 화가 천경자도 베트남 종군화가를 자청했을 정도로 예술적 행보에 적극적이었다. 이혼과 가정불화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파구로 세계 일주를 택했다.

다 내려놓고 떠나는 일, 비교적 거취가 자유로운 예술가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두 화가처럼 운명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지만 화가 신수원(37)도 요즘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신 씨가 지역 화단에 명함을 내민 지 10년. 그동안 모두 10여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전시회가 거듭될수록 화단에서의 지명도는 올라갔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스스로 더 이상 내려설 곳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신 씨가 선택한 것은 유학이었다. 유학하면 일부 부유층들의 호사 행보를 떠올리지만 신 씨의 경우는 좀 다르다. 혼자 길을 떠나야 하는 탓에 가족과 긴 이별을 감수해야 한다. 그에게 가족들의 배려와 격려는 가장 큰 힘이 되었기에 서로에게 공백은 크게 다가온다.

지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도전이라고 격려하지만, 자신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비행(非行)이라고 비하한다. '도전'과 '비행' 사이에서 새로운 '스케치'를 준비하고 있는 신 화가를 작업실에서 만나 보았다.

◆'유년 시리즈' 끝난 후 깊은 좌절감

피카소는 화가의 창작 활동을 '일종의 일기를 쓰는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일기장에 그날의 강렬한 인상을 기록하듯 화가의 캔버스에도 당시의 가장 절실한 고민, 화두가 옮겨진다.

신 씨는 2006년부터 모두 13차례에 걸쳐 개인전, 초대전을 가졌다. 전시회마다 테마를 직접 정했고 주제에 맞춰 모든 작업을 진행해왔다. 몇 번 콘셉트를 벗어난 적이 있지만 신 씨의 화제(畵題)는 유년시절의 기억에 닿아 있다.

"'이브의 집'(2010), '봄의 로망스'(2013), 'The Father'(2014) 전이 모두 저의 유년시절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제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서 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아에 대한 고충을 숙제하듯 풀어냈어요."

신 씨의 유년시절에 대한 긴 여정은 작년에 일단락되었다. 무엇엔가 쫓기듯 붓을 잡은 지 8년 만이었다. 막상 자전적 연작(連作) 시리즈를 화폭으로 풀어내고 보니 자신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다시 한 번 자기 점검이 필요했다. 그 반성과 후회를 올해 '我+실현' 전에 담았다.

숙제 같았던 연작 스토리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후유증도 만만찮았다. 우선 몸 안의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듯한 허탈감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유년의 기억을 정리하고 나면 현재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구상이 열리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이젠 새 화두를 잡아야 하는데 도대체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어요.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 처방으로 유학을 떠올린 거죠."

◆화려한 원색은 유년의 추억들

'색을 쓸 줄 아는 화가'. 화단에서 신 씨를 평가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닉네임이다. 캔버스에 뿌려진 화려한 원색은 고흐와 고갱의 인상주의 화풍을 연상케 한다.

신 씨의 이런 과감한 색은 소녀 시절의 기억에서 근원 한다. 신 씨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주의 오릉(五陵) 근처 산골마을. 눈을 뜨면 노란 들꽃이 카펫처럼 펼쳐지고 창을 열면 산등성이 실루엣이 시선을 간질이는 목가적 마을이었다.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은 삼 남매의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산골의 사계절은 말 그대로 색의 향연이었어요. 철마다 각기 다른 색으로 펼쳐지는 자연은 말 그대로 거대한 캔버스였죠."

신 씨는 작업 때마다 가장 순수하고 맑았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억의 조각들을 화폭에 옮겼다.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원색들도 이런 정제과정이 있었기에 부담없이 화폭에 녹여낼 수 있었다.

과감한 색의 차용(借用)의 모티브는 또 있다. 바로 옆집에 살던 화가 아저씨였다. 단 두 채뿐인 외딴 마을에서 화가의 작업실은 신 씨의 놀이터였다.

"당시에 아저씨는 무속인을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색채가 무척 강렬했습니다. 그런데도 무녀의 섬뜩한 눈빛이며 무구(巫具)들이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그 색깔들이 제 기억 속에 편린으로 자리 잡은 거 같아요."

◆프랑스에서 백지상태로 출발할 것

신 씨는 개인전, 초대전을 포함해 이제까지 총 100회 이상의 전시회를 가졌다. 10년 동안 화가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이력이었다. 바쁜 중에도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기꺼이 '나눔의 붓'을 펼쳤다.

작년 대구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자선전을 요청받았을 때 기꺼이 전시회를 열었다. 작년 12월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를 공연할 때 콜라보를 제안 받고 망설임 없이 재능기부를 했다.

이제 신 씨는 내년 초 화단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소르본느로 떠난다. 프랑스에 가면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리셋하고 백지상태에서 자신을 채워갈 것이다.

나혜석, 천경자가 외유를 통해 작품세계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 한 사조(思潮)를 이루었던 것처럼 신 씨도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과정이고요. 2년을 20년처럼 압축해서 살 거예요. 틈틈이 여행도 다니고 1년에 한 번씩 개인전도 할 겁니다. 많은 변화를 시도하겠지만 저의 일생의 가치인 초현실주의와 '소통의 수단으로서의 그림' 원칙은 평생 화두로 지켜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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