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시골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 하나쯤 있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신줏단지 같은 것들도 있지만, 때로는 몽당 빗자루 같은 하찮은 물건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서 어린 손주들은 할머니들에게 묻는다.
"할매, 저건 먼데 저래 모시 놨노?"
그러면 할머니들은 눈이 반짝 빛나면서 신나게 말씀을 한다.
"저기 느그 5대조 할아버지 잡아 온 도깨비 아이가. 그분이 군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장사라 카데. 아매 소도 맨손으로 때리잡을 정도로 엄청시리 힘이 셌다 카제."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힘이 장사인 할아버지가 장에 가서 아이들 줄 엿 사고, 사람들하고 술도 한잔 해서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을 어귀 행상집(상여를 두는 창고) 부근에서 도깨비를 만났다는 것이다. 도깨비가 "엿 하나 주면 고이 보내 주지."라고 말하니까 할아버지가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함 붙어보자." 해서 도깨비와 씨름을 했는데, 결국 천하장사 할아버지가 도깨비를 업어치고, 메치고 해서 초죽음을 만들어서 집으로 끌고 와 기둥에다 묶어 두고 한숨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저 몽당 빗자루였다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한 아이들의 가슴에는 도깨비도 때려잡는 아주 힘센, 자식을 위해서는 엿 하나도 뺏기지 않는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자라났다. 그리고 촌수로는 열촌도 넘어가는 먼 친척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다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끈끈한 공동체적인 유대감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다시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는 동안 이야기는 점점 더 커지고 신성한 성격을 띠게 된다. 이렇게 이어져 온 것이 바로 신화이다.
신화라고 하면 단군신화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에는 단군신화나 동명왕 신화, 혁거세 신화와 같은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부터, 인간과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 창세 신화,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는 신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맞짱을 뜨고 다녔는데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큰형님에 대한 조직의 신화 등 다양한 층위의 신화들이 있다. 이런 신화들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원래 그렇게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서 뒤엎을 수 없는 절대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된 민족, 국가, 집단에서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손주들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에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술 취해서 헛것을 본 거겠죠. 세상에 도깨비가 어디 있어요? 난 또 뭐 대단한 건 줄 알았네."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 순간 도깨비를 때려잡았던 천하장사 할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허풍쟁이가 되고, 할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했던 우리 집안을 상징하는 위대한 전리품이었던 몽당 빗자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신화의 세계가 깨지는 것이다. 신화가 깨지는 순간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생각으로 끈끈하게 유지되어 왔던 공동체도 무너진다. '우리 할아버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사라지고 머리로만 차갑게 역사를 배우는 현재의 모습만 남게 된다.
일연 스님은 서문에서 성인들의 괴력난신(怪力亂神)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제왕들이 대업을 이룰 때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우리나라 역시 그런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일을 다룬 기이(奇異)편을 첫머리에 둔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작다고 하지만, 깨지면 안 되는 유구한 우리 민족의 신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결코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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