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道가 동쪽으로 왔다' 도동서원 400여 년 된 은행나무의 위엄
구지면은 달성군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을 경계로 고령군과 구분된다. 남쪽으로 경남 창녕군과 경계를 이룬다. 현풍'유가면과 이웃한다. 면 소재지는 창리다. 대니산을 경계로 현풍면과 마주하고 있다.
구지면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홍의장군' 곽재우의 묘역이 조성된 곳으로 유명하다.
구지면은 창리(倉里), 응암리(應岩里), 고봉리(高峰里), 가천리(加川里), 평촌리(坪村里), 예현리(禮峴里), 유산리(柳山里), 목단리(牧丹里), 대암리(臺岩里), 내리(內里), 화산리(花山里), 수리리(修理里), 오설리(烏舌里), 도동리(道東里), 징리(迲里) 등 15개의 법정리와 29개의 행정리가 있다.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道東書院)
현풍에서 구지면사무소를 지나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4㎞쯤 가면 도동서원을 만난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됐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꿔 중건됐다. 하지만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동서원의 건립을 주도한 인물은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다. 한강은 나무를 남겼고, 퇴계는 말을 남겼다. 도동서원 앞에 있는 400여 년 된 은행나무는 중건 당시 한강 정구 선생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方道學之宗)며 칭송하는 말을 남겼고, '도동서원'(道東書院)이 됐다.
도동서원과 김굉필의 연고는 그의 증조부 김중곤이 현풍 곽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성장기를 대니산 남쪽 솔례촌에서 보낸 한훤당은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18세 때 합천군 야로에 있는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 근처 계곡에 '한훤당'이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인근 함양의 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수제자가 됐고,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정몽주-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게 된다.
자신 또한 큰 스승이 돼 조광조, 김안국, 성세창, 이장곤 같은 인물들을 제자로 배출한다. 김종직에게 배웠고 조광조를 가르친 것이다. 이것이 김굉필의 삶과 죽음과 업적을 모두 설명한다.
우선 그의 스승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썼다. 이것은 무오사화의 불씨가 돼 조정과 유림에 피바람이 일어난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굉필 역시 연좌제로 엮여 결국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
김굉필은 어릴 때부터 기질이 너무 호탕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피인물이 되기도 했는데 자라면서 학문에 힘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소학'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했다.
김굉필은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방에 고요히 앉아 책을 보면서 밤이 깊도록 자지 않았다. 다만 갓끈이 책상에 닿아 소리가 나면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또한 닭이 울면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 닦기를 쉬지 않았다.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형장에서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고, 수염을 간추려 입에 머금고 "이 수염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당하게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1719)대의 학자 김하석(金夏錫)이 김굉필의 시와 사적을 역은 경현록(景賢錄)에 그의 언행에 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 데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도들이 집 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선생이 벗들과 같이 거처할 때 첫닭이 울면 일어나 함께 앉아 호흡을 세는데, 남들은 겨우 밥 지을 동안도 못 되어 다 잊어버렸으나 홀로 선생만은 또렷이 세어서 밝을 때까지 잊어버리지를 않았다."
또 그의 제자 조광조와의 일화도 유명하다. 어느 날 김굉필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두었다. 모부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먹었다. 이를 안 김굉필은 지나칠 정도로 종에게 꾸지람을 했다.
이에 조광조가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사기(辭氣'말과 표현)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김굉필은 어린 제자의 충고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도다. 부끄럽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하고 감탄했다.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곽재우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1552년(명종 7) 8월 28일 외가인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승지'관찰사를 역임한 곽월(郭越)로 선대는 달성 현풍에서 세거한 명문집안이었다.
그는 1565년(13세)부터 숙부 곽규(郭赳)에게서 '춘추'를 배우면서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장인 김행(金行)은 당시의 대표적 학자인 남명 조식(曺植)의 사위였고, 따라서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 사위가 된 것이었다. 손위 동서도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대사성 등을 역임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다.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한 선조는 합격을 취소시켰다.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곽재우는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3년 상을 치르고 1588년에 탈상했다. 36세였다.
임진왜란. 조선 최대의 국난은 곽재우가 은거한 지 4년 만인 1592년 4월에 발발했다. 그때 곽재우는 40세의 장년이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없이 행동에 나섰다.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영산'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현풍'창녕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가 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기도 했다.
곽재우는 말년에 창녕 영산현 낙동강변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거처하다 1617년(광해군 9년) 66세 되던 봄에 창증으로 위독해져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예연서원(禮淵書院)의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내 죽거든 '예장(禮葬)하지 말라'
구지면 신당리 곽재우의 선산에는 본인을 위시해 증조부, 조부, 부친, 숙부, 종숙, 종형, 형 등 5대에 걸친 유택이 모셔진 묘역이 있다.
곽재우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예장(禮葬)하지 말라. 왜란 때 선왕의 두 능이 부서지고 불탔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묘의 봉분을 쌓겠는가. 내가 죽거든 구덩이에 그냥 묻기만 하라"고 해 봉분 없이 평장(平葬)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로부터 114년이 지난 1731년(영조 7년) 한음 이덕형(李德馨)의 후손 현풍현감 이우인(李友仁)이 묘소를 참배한 후 "실묘가 염려된다"며 문중을 설득해 봉분만 낮게 손을 봤다. 다음해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이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로부터 비문을,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에게서 글씨를 받아 묘비를 세웠다.
곽재우는 평생 모두 29회에 걸쳐 관직에 임명됐다. 그중 15회만 나갔고, 나머지 14회는 거절했다. 그나마 임지에 부임한 후에 곧바로 사직해 실제 벼슬에 있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는 쥐만 잡으면 할 일이 없다"며 영산 망우정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진동하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으며, 붉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곽씨 문중에서는 장지를 이곳 구지의 신당마을로 정하고 무덤의 광중(壙中)을 파니 물이 한없이 솟아나는 바람에 "도저히 이곳에 묘를 쓸 수 없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때 광경을 지켜본 한 도인(道人)이 나서서 "여기에 묘를 쓰려면 방아실 마을(구지면 창리) 어느 한 곳을 파헤쳐야 이곳의 물이 잦아든다"고 주장했다. 도인의 말대로 한 결과 방아실 마을에서 물이 기둥처럼 솟아오른 반면, 곽재우의 유택에서는 물이 점차 마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이 일대 전답에는 물이 잘 마르지 않았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땅이 '질다'라는 의미의 '질구지'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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