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는 비껴갔지만…제 기타는 이제 봉사의 선율 울립니다
단 두 번 같은 무대에 섰다. 그것도 게스트로. 콘서트 대기실을 포함 10여 번 정도 사석에서 만났다. 가수 김동식에게 김광석과의 인연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김광석과 연결하고 그의 노래에서 김광석을 반추한다.
같은 포크가수라서? 창법이 닮아서? 그의 목소리를 통해 김광석을 회상하고 싶어서? 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그를 통해 김광석을 추억하려고 한다.
그에게 김광석은 '거목'(巨木)이었다. 감히 그림자도 밟지 못했다. 가객(歌客)이 홀연히 저세상으로 떠난 후 음악계에선 그를 '포스트 김광석'으로 지목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도 그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길은 순탄치 않았고 운명은 쉽게 그를 김광석과 맺어주지 않았다.
꿈이 비껴간 후 기타를 다시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봉사의 선율이었다. 어느 매체의 표현대로 '유명' 대신 '유익'을 선택한 것이다.
7년째 그는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대구백화점 앞으로 거리 공연을 나간다. 그 앞엔 모금함이 놓여진다.
포스트 김광석에서 '사노봉'(사랑의 노래봉사단) 단원으로 변신한 가수 김동식을 연습실에서 만나 보았다.
◆음반사들 '포스트 김광석'으로 영입 경쟁
1996년 1월. 한 가객이 세상을 등졌다. 시대의 우울한 감성을 여섯 줄 기타에 담아 전국을 울렸던 김광석이었다. 애수 어린 노랫말만큼이나 세상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눈치 빠른 음반사들은 부쩍 커버린 포크시장 공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작사들은 서둘러 김광석을 대체할 '닮은꼴 김광석'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대구 출신의 호소력 짙은 보이스의 김동식이 영입 1순위로 부상했다.
1996년 유명 음반사와 계약을 맺었다. 대우도 스타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미용실 갔다가 피부숍 들러 마사지 받고, 오후에 곡 쓰고 노래 연습하고 꿈같은 세월이었죠. 광석이 형이 섰던 자리에 제가 설 날이 머지않았구나 싶었어요."
음반 준비가 반쯤 진척되었을 때 기획사 사장이 돌연 잠적을 했다. 자금난으로 부도를 낸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를 다시 스튜디오로 불러낸 건 또 다른 음반사였다. 당시 그 회사는 R&B, 발라드, 포크 앨범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를 포크가수로 영입했던 것이다. R&B, 발라드 음반이 나오고 포크 음반 차례가 왔을 때 운명은 또 한 번 그를 비껴갔다. IMF 사태가 터져 버린 것이다.
"제가 광석이 형과 인연이 안 닿는 건지 아니면 가수와 인연이 없는 건지 손잡은 업체마다 부도가 났어요. 두 번 다 음반 취입 직전이었죠. 덕분(?)에 제 삶도 마이너(minor) 코드처럼 우울해졌습니다."
1999년쯤 서울에서의 낭인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왔다. 당장 호구지책이 문제였다. 때마침 팔공산에서 전원카페 붐이 불기 시작하면서 통기타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차 타고 내려온 당일부터 무대에 뛰어들었다. 서울에서의 울분을 카페에서 한 풀듯 노래로 풀어냈다. 얼마 안 돼 입소문이 났고 여기저기서 그를 모시려고 업주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 콘서트에 게스트로 초대
어릴 적부터 기타는 김 씨의 장난감이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하이코드를 잡았고 웬만한 핑거 주법을 마스터했다. 타고난 재능은 자연스럽게 그를 음악으로 이끌었다.
학창시절 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다. 고교시절 이미 창작곡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가정 형편 탓에 피아노 레슨 기회를 놓쳐 지역 음대입시에서 떨어졌다. 한때 '작곡의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였지만 클래식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 해 후기에서 전문대 방송연예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바로 포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소질과 창법을 눈여겨본 지역의 한 기획사가 그를 김광석과 연결해 주었고 게스트 출연 기회는 그렇게 잡혔다.
"1993년 경북대 강당에서 콘서트를 할 때였어요. 제겐 첫 무대였는데 초조해하는 나를 보고 '괜찮아! 우리 잘해보자'며 격려해 주더군요. 형과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 저한테는 영광이었는데 후배를 챙기는 마음씨가 저를 더 감동시켰던 거죠."
공연 후 아쉽게 쫑파티를 하고 수줍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단 한 번 무대로 끝날 것 같던 가객과의 인연은 그해 가을 금호호텔(현 아미고호텔) 공연에서 다시 이어지면서 이제 둘은 얼굴을 트게 되었다.
"제 순서가 되면 '제가 아끼는 후배가 나옵니다. 잘 지켜봐 주십시오'라며 소개 멘트를 직접 날려 주셨어요. 덕분에 제 무대 비중이 훨씬 커져 버렸어요."
둘은 선후배를 넘어 형, 동생으로 교제를 넓혀갔다. 대구에 내려올 때마다 연락을 주고받으며 밤새워 음악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형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배들과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선후배들과 밤새 술을 마셔도 형의 기억은 더 또렷해져만 갔습니다"
◆10년째 '사노봉' 활동 이젠 봉사의 선율
김광석을 그렇게 보내고 몸담았던 음반사마다 부도가 나자 그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전원카페에서 시름을 달래던 그에게 '거리 공연' 제안이 들어왔다.
선후배 서너 명이 합류하면서 팀이 꾸려졌고 길거리 자선공연 노래모임 '길사모'는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수성못, 동아백화점, 두류공원을 돌며 길사모의 자선 공연은 10년 동안 계속 되었다. 경사도 있었다. 활동을 지켜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그들을 봉사단체상에 추천했고 2009년 길사모는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청와대에 초청되어 공연을 가졌는데 통기타 소리가 청와대에 올려 퍼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을 디딘 음악봉사는 2008년 사노봉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자선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김 씨는 매월 네째 주 일요일 동성로에서 거리공연을 한다. 생업을 위해 틈틈이 무대에 오르고 게스트로 초청을 받기도 하지만 무명가수로서의 삶은 여전히 남루하고 고달프다. 그래도 그는 오를 무대가 있어서 좋고 불러 주는 팬들이 있어 행복하다.
40대 중반 늦은 나이지만 그에게 가수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얼마 전 2집 앨범을 내고 본격 가수활동에 뛰어들었다.
"제 기타는 두 개의 코드로 튕겨집니다. 하나는 봉사의 선율, 하나는 아직도 유효한 가수의 꿈이죠. 두 멜로디가 언젠가는 경쾌한 화음으로 울려 퍼질 겁니다."
◆"김광석 형이 '넌 대기만성'이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맞는 것 같아요"…김동식 가수의 꿈 '현재 진행형'
20대에 두 차례 중앙무대 데뷔 꿈이 무산되고 40대에 김동식 씨는 또 한 번 '슈스케 3'(슈퍼스타K)에 도전했다. 2011년 당시 슈스케의 인기는 최절정. 그해 전국 지원자가 197만 명을 넘어섰다.
지역 예산을 거쳐 '슈퍼위크'에 진출한 팀은 모두 50여 명.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지만 본방에서 끝내 그의 이름은 불려 지지 않았다.
기획사들은 울랄라세션, 정준영 같은 젊고 대중성을 갖춘 가수를 원했던 것이다.
슈스케에서의 실패가 그의 가수 꿈까지 좌절시킨 건 아니었다.
2010년 김 씨는 2집 앨범을 발매했다. 4곡이 들어 있는 싱글앨범이었다. 타이틀곡 '인생'은 대구보건대 박은규 교수가 술자리에서 건네준 시를 곡으로 옮긴 것이다.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다.
"세션부터 엔지니어, 녹음, 앨범 재킷 사진까지 모두 대구 산(産)입니다. 100% 토종이죠. 이게 자랑거리 같지만 저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유통, 홍보사가 서울에 집중돼 있는 마당에 이런 자부는 넋두리일 뿐이죠."
다행히 선주문도 있었고 그의 음악을 사랑해주는 지인들 덕에 음반 2천 장은 완판 되었다.
서울에서 전파 한 번 타지 못하고 방송사에서 연락도 잘 오지 않았지만 김 씨가 이렇게 음반을 내는 이유는 '내가 아직 살아있고, 내 음악이 아직 건재하다'는 존재의 아우성인 것이다.
"언젠가 광석이 형이 저한테 '넌 대기만성형 같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40대 중반에 들어서 보니 형 보는 눈이 정확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실망은 안 해요. '만'(晩)자기 들어가긴 하지만 결국은 '이룸'(成)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한상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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