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나 우리나 두 집이 다 같이 난리를 만나서 자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조부님이 돌아가셨으니 서로 마찬가지네. 그렇다고 학문에 힘쓰지 아니하면 나중에 옷입은 짐승이 아니겠는가?"
임진왜란 때 안동의 학봉 김성일 집에는 멀리 광주에서 피란온 의병장 고경명의 막내아들 고용후 가족 등 50여 명이 더부살이 중이었다. 학봉 손자 김시권은 1593년 4월 29일 진주성에서 할아버지를 잃고 또래 나이의 고용후와 각오를 다졌다. 당시 고용후는 아버지와 둘째 형(고인후)을 1592년 7월 금산전투에서 잃었다. 큰 형(고종후)도 1593년 6월 29일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에 패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터여서 두 사람은 동병상련이었다.
두 사람은 1605년 과거에 나란히 합격해 피란시절 각오를 지켰다. 10년 뒤인 1617년 고용후는 안동부사가 됐다. 그리고 학봉의 부인(김시권 할머니)과 학봉 큰아들(김집)을 초청해 보은의 잔치를 열었다. 큰절을 하며 고용후는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라며 울먹였다('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 중에서, 이해영, 2006).
두 집안의 사연은 15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봉은 그해 나주목사로 부임해 1586년 12월 해임 때까지 전라도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나주는 학봉이 유일하게 고을 책임자로 부임한 곳이다. 이듬해(1584년) 나주 토박이 나주 나(羅)씨 집안과 고을 선비 도움으로 나주의 첫 서원을 세웠다. 뒷날 경현서원으로 바뀐 대곡(혹은 금양)서원이다. 고을 사람들은 이곳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모셨다. 100년 뒤 1693년에는 학봉도 나주가 낳은 인물인 기대승과 함께 배향됐다.
나주는 옛 전라도 중심으로 나주목(牧)이 있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 학봉이 처음 서원을 건립했고 고을 사람들은 영남학파 거유를 모셨다. 나주와 경상도 특히 경북과의 인연이 보통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기대승은 26세 많은 스승 이황과 12년에 걸쳐 편지로 학문을 논한 대학자다. 이황은 일찍 그의 인물을 알아보고 선조에게 적극 천거한 스승이다.
지금 경북도 상주와 전남도 나주가 옛 경상도와 전라도 중심의 영광 재현사업에 나서고 있다. 내년부터 10년간 500억원씩 1천억원으로 옛읍성 등 역사문화자원을 복원한다. 오랜 인연의 나주와 경북이 그려낼 모습이 벌써 기대된다. 전남 나주배와 경북도 영주사과의 '홍동백서' 같은 또 다른 상생작품의 탄생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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