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제 눈의 들보

입력 2015-08-24 01:00:05

1955년 울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1977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1955년 울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1977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전직 총리 최초로 징역 살게 된 한명숙

지난 총선 야권연대 만든 정치판 거두

부패혐의 기나긴 재판 과정 지켜보며

좌파든 우파든 더럽게 썩는다는 느낌

한명숙 씨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이 '드디어' 나왔다. 드디어 나왔다고 한 건 대법원 선고가 이례적으로 미뤄진 때문이다. 수사가 시작된 지 5년, 2심 판결이 난 지 2년이 다 됐으니 솔직히 대법원의 '직무유기'는 도를 넘었다. 주심 대법관이 퇴임하고 새 대법관 인준이 미뤄지자 한 씨의 대법원 선고를 연기시킬 목적이라는 음모설이 나돌기까지 했다. 법리 다툼이 있는 어려운 사건도 아니었다. 게다가 말이 정치자금법 위반이지 속살은 뇌물수수인 부패범죄였다. 재벌도 아닌 중소건설업자가 9억원이나 되는 돈을 아무 대가도 없이 정치자금으로 뿌릴 리가 있겠는가? 대법원 판결은 '당연히' 상고기각이었다. 그 순간 한명숙 씨는 전(前) 의원이 되었고 전직 총리로서는 최초로 징역을 살게 됐다. 대법원은 사실관계는 심리하지 않고 법률 적용의 문제만 살피는 법률심(法律審)이니, 사실 상고기각은 법률가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온갖 말들이 쏟아졌다. 신문 제목도 진영에 따라 사뭇 느낌이 달랐다. 놀라운 것은 야당의 반응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비장한 표정으로 "정말 참담한 심정이며 대법원 판결에 실망이 아주 크다"고 말했다. "검찰의 정치화에 이어서 법원까지 정치화됐다"며 판결을 폄하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도 뒤질세라 "다수로 소수의견을 묻어버린 대법원 판결에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는 '이상한' 말로 문 대표를 거들었다. 그렇다면 다수의견 대신 소수의견을 채택한 판결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문 대표는 법원의 정치화 같은 틀에 박힌 말을 하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패에 연루된 야당 의원이 어디 한둘인가? 하루 전엔 전 원내대표인 박기춘 의원이 구속되지 않았는가. 공익보다 사익(私益)에 빠진 더러운 정치에 대해 국민에게 부끄럽다며 용서부터 빌어야 했다.

이 사건은 시작부터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당시 한 씨는 곽모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달러 뇌물을 받았다 하여 1심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총리공관에서 현장검증을 벌여 세간의 화제가 된 사건이다. 야당과 좌파 언론은 5만달러 사건이 무죄를 받을 판이니 별건 수사를 하는 것이라고 검찰을 공격했다. 한 씨는 변호사와 지지자에 둘러싸여 탄압받는 민주투사처럼 법정을 드나들었다. 그는 수사단계서부터 공판까지 검찰의 신문에는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묵비권은 피의자와 피고인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가 전직 총리가 아니었어도 이런 묵비권 행사가 불이익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야당의 거두(巨頭)가 아니었다면 그런 묵비권 행사가 가능하기나 했을까? 무엇보다도 언론이 그런 묵비권을 가만두었을까?

한 씨는 어쨌든 1심에서 무죄를 받아냈다. 돈을 준 건설업자가 검찰에서의 진술을 뒤집었던 것이다. 그러나 2심은 달랐다. 2007년 세 차례에 걸쳐 건넸다는 9억원 중 1억원짜리 수표를 한 씨의 동생이 쓴 것과 한 씨의 비서가 건설업자에게 돌려준 2억원을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였다. 돈을 담아 운반한 가방을 구입한 영수증도 증거가 됐다. 대법원에서 소수의견은 이 3억원에 대해서만 유죄라는 것이다. 설사 그 소수의견이 맞다 해도 한 씨가 부패정치인이라는 건 바뀌지 않는다.

한명숙 씨가 누군가? 나는 그가 좌파라거나 과거 통혁당 사건에 연루됐다거나 더 나아가 남편인 박성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걸 탄핵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나라의 총리를 지냈고 지난 총선 때 야당 대표로서 야권연대를 만든 정치판의 거두다. 그런 분이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는 기나긴 과정을 지켜보며 이 나라는 좌파든 우파든 썩어도 참 더럽게 썩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 눈의 들보는 절대 보지 못해 온 국민의 자존심을 찢고야 마는 추악한 투사(鬪士)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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