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사회는 맹목적이라고 흔히 비난받는다. 무조건 한 정당에만 투표하는 성향을 보면 이 비난을 대구 스스로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구가 원래 맹목적이었던가?
맹자의 '우산지목'(牛山之木)이란 비유가 있다. "우산의 나무는 일찍이 아름다웠으나, 큰 도시 부근 사람들이 도끼로 나무를 마구 베어버리니, 어찌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
'우산'을 나무 없는 민둥산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게 맹자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은 본시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의 뿌리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대구 사대부들이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해방 후 1946년에 미군정 폭압에 항의한 '10월 항쟁'의 주역은 박정희가 그토록 따랐던 친형 박상희였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대항한 진보당 조봉암은 대구에서 70% 지지를 얻었다.(전국 30%, 서울 37%) 4'19의 첫 도화선인 2'28의거의 주인공은 대구 고등학생들이었다. 1965년의 한일협정과 1969년 삼선개헌을 격렬하게 반대하여 박정희를 괴롭힌 지역이 대구였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의 수성천 연설회에 대구 시민 100만 명 가운데 30만 명이 모였다. 대구는 김대중을 선택하기보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견제했다.
대선 한 달 뒤인 5월 총선에서 박정희의 공화당 후보 다섯 명이 모두 낙선했다. 그중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과 뒤에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도 포함됐다. 이효상은 대선에서 지역감정을 일으켜 박정희 당선에 기여했음에도 총선에서 대구 시민에게 여지없이 심판당했다.
대구에서 위기를 느낀 박정희는 대통령 직접 선거를 없애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이 유신에 가장 크게 저항한 지역이 또한 대구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1975년 대구 출신 지식인 8명을 대법원 판결 후 23시간 만에 사형시킨 '인혁당 사건'을 만들었다. 그런 공포 속에서도 당시 재야에서 김문수를 비롯한 대구 사람들이 유신에 극렬히 저항했다.
고등학교 때 읽은 글이다. "새 가운데 가장 빠른 제비가 공기 저항 때문에 더 빨리 날 수 없다고 투덜댔다." 공기 없으면 숨 쉬지 못하는 데도 말이다. 이 글에서 제비를 정치가로, 공기 저항을 비판으로 바꾸면 정치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된다.
완벽한 정치를 하기는 힘이 든다. 민주사회에서 비판은 공기처럼 필수다. 비판 없는 보수는 천박한 맹목이다. 민둥산인 우산은 과거에 숲이 가득했으며, 지금 고담(Gotham) 도시라고 비난받는 대구는 박정희를 치열하게 비판한 도시였다. 원래 대구는 정치적 민둥산도 고담 도시도 아니었다.
생각하는 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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