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 침범-천안함·연평도 포격…스러진 젊은이들

입력 2015-06-06 05:00:00

6'25전쟁 이후에도 북한은 꾸준히 휴전선을 넘어 도발을 시도해왔다. '햇볕 정책' 등으로 북한에 대한 유화적 태도를 취했던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북한의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느라 북한의 도발과 그들의 도발에 목숨을 걸고 대응한 젊은이들의 피를 잊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먼저, 가장 최근 시기인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일어났던 북한의 도발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았다.

#1. 2002년 6월 29일

전국이 월드컵의 열기로 들썩이던 2002년 6월 29일은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 4위전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국민들이 한창 거리응원을 준비하던 그때, 서해 연평도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이날 오전 10시 북한의 경비정 2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온 것. 서해 연평도를 지키던 참수리357정을 포함한 4대의 해군 고속정이 출동했다. 고속정들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북한 경비정 진행방향의 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북한 경비정 684함이 358정을 지나친 순간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358정의 뒤를 따르던 357정은 갑자기 정지한 북한 경비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었고 우현이 그대로 북한 경비정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때, 북한 경비정이 경고 사격 없이 선수의 85㎜ 전차포를 357정에 사격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됐다.

교전의 시작과 동시에 85㎜ 포탄은 357정의 조타실에 명중했고 정장인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조타장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전사하고 기타 승조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어진 사격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기기가 파괴되어 357정은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너무 가까운 거리라 사격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북한 경비정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은 357정만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제2연평해전은 북한 경비정이 아군 고속정의 집중공격을 받은 뒤 25분 만에 퇴각하면서 끝이 났다. 이 해전으로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 중사를 포함한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2. 2010년 3월 26일

대다수의 국민들이 편안히 저녁 뉴스를 시청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뉴스를 보던 국민들은 갑자기 들어온 속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령도 남서쪽 약 1㎞ 지점에서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훈련 도중 북한 해군의 어뢰에 의한 폭발로 인해 선체가 두 동강 나며 침몰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뉴스 속보에는 "해군 초계함이 어떤 물체에 부딪혀 침몰 중에 있으며 해군 장병들을 구조하기 위해 관련 인력이 출동 중"이라고만 알려질 뿐 도대체 어떤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지 국민들은 알 길이 없었다. 다음 날 뉴스에는 "58명이 현장에서 구조되고 46명은 구출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실종자들을 찾기 위한 해군의 수색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해군 특수전 여단 소속 한주호 준위가 실종자들을 수색하던 중 잠수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했다.

천안함이 침몰된 뒤 정부는 민군합동조사단을 꾸려 침몰 원인을 밝혀내는 조사를 실시했다. 그해 5월 20일, 민군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은 가스터빈실 좌현 하단부에서 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서해의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용되던 일부 소형 잠수함정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이 천안함이 침몰되기 2, 3일 전에 기지를 이탈했다가 천안함 침몰 2, 3일 후에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됐으며 다른 주변국의 잠수함정은 모두 자국의 모기지 또는 그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됐다. 결국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발표 이후에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의문과 근거 없는 소문, 유언비어 등이 난무했다.

#3. 2010년 11월 23일

천안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그해 11월 23일 오후 2시쯤, 평화롭던 연평도의 오후를 깨는 포성이 들려왔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굉음과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갑자기 어디선가 포탄이 날아온 것이다. 당시 하교하던 연평초등학교 학생들은 무방비로 폭격 위험에 노출돼 있던 상태였고 낮잠을 자던 연평어린이집의 원생들도 포성 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당시 연평도의 해병대 부대원들은 포 사격훈련 중이었다. 갑자기 앞쪽에서 잇따라 무언가가 폭발하며 화염이 솟구치면서 적의 공격이 시작됐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부대원들은 자주포들을 일단 숨기고 대피했다가 적의 포 공격이 잠잠해지자 K-9 자주포 3문으로 대응사격했다. 북한군의 초반 포격에 한국군은 2대의 K-9 자주포가 손상되었고, 남은 3대의 자주포로 50발의 보복 사격을 개시했다. 30발쯤 사격할 때 1대를 긴급수리해 4대를 투입. 이후 북한이 다시 레이더 기지를 노리고 개머리 반도에서 포격을 개시하자 한국군은 다시 30여 발의 포를 개머리 반도에 발사했다. 교전이 중지될 때까지 북한군은 총 170여 발의 포를, 한국군은 80여 발의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 합참의장의 발표에 따르면 오후 3시 41분 일단 포격은 종료되었다.

포격이 끝난 뒤 연평도는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북한이 발사한 포탄들로 인해 군 막사가 파괴되고 인근 숲 등 10곳이 불에 탔다. 떨어진 포탄 중 몇 개는 주민들이 사는 가구 위로 떨어져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포격에 서정우 병장, 문광욱 이병이 전사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일어난 연평도 포격 도발은 북한이 휴전 이래 대한민국의 민간인 거주 지역을 직접 공격한 첫 사건이었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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