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은군(尋胡隱君)
은자를 찾아서-고계(高啓)
물을 건너고 다시 건너고
꽃을 보고 다시 본다네
봄바람 강변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언제 왔나 몰라, 그대 집 앞에
渡水復渡水(도수부도수) 看花還看花(간화환간화)
春風江上路(춘풍강상로) 不覺到君家(불각도군가)
[심호은군(尋胡隱君)]
*胡隱君(호은군): 胡氏(호씨) 성의 은자. 은군=은자. *還(환): 또. 다시. *不覺(불각):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君(군): 그대.
시는 문화와 예술의 꽃이다. 하지만 시가 공포와 광란의 도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명나라 초기를 대표하는 시인인 고계(1336~1374)에게도 시는 화장기가 전혀 없는 민얼굴의 청초한 꽃이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자유인으로서, 아름다운 강남 땅을 배경으로 구슬과도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지은 시문이 천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바람에, 시인은 난데없이 수도로 끌려가서 허리가 잘리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형벌을 당했다. 그에게도 시는 꽃이었지만, 무시무시한 도끼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인의, 피비린내나는 최후와 달리 이 작품은 환한 등불을 밝힌 민들레꽃같이 귀여운 시다. 화자는 지금 은자가 사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 물을 건너고 다시 물을 건넌다. 이 대목에서 만약 물을 단 두 번 건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알다시피 오언시는 5자 안에 한 덩어리의 응축된 시상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마치 단 두 번 물을 건넌 것 같이 표현했지만, 실상 그는 여러 번에 걸쳐 물을 건넌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화자는 단 두 송이 꽃을 본 것이 아니라, 강가에 피어 있는 무수한 꽃들을 낱낱이 살펴보며 완전 넋을 잃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대자연에 도취하여 봄바람 강변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내용이고, 시인이 꼭꼭 숨겨놓은 그 무슨 심각한 메시지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무한한 여운과 정취가 어려 있고, 시상의 전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그야말로 천의무봉이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얘기 하나만 보태자. 요즘 나의 출근길은 은자를 찾아가는 시인의 발걸음과 거의 흡사하다. 자전거를 타고 금호강 둑길을 강물을 따라 내달리다 보면, 민들레꽃, 오랑캐꽃, 토끼풀, 살구꽃, 벚꽃이 팝콘을 퍽퍽 터뜨려서 아예 지랄발광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그 몽환적인 지랄발광 길을 신명나게 내달려가면서 '오빠 생각'이나 '고향의 봄' 같은 좀 슬픈 동요들을 부르다 보면, 노래가 슬픈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점점 더 좋아진다. 그때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학교인가, 민들레꽃보다도 훨씬 더 귀여운 우리 과 여학생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이종문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104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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