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의미 있는 노동'의 유토피아

입력 2015-03-16 05:00:00

1956년 경기도 화성생. 연세대 독문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 철학박사. 계명대 총장
1956년 경기도 화성생. 연세대 독문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 철학박사. 계명대 총장

한때는 노동하지 않는 사회가 유토피아

현대는 노동과 일자리 가져야 유토피아

일자리를 얻어야 비로소 자기 실현 가능

청년세대에게는 일자리가 미래의 희망

한때 노동이 없는 사회가 유토피아로 여겨진 적이 있었다.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에도 사람들이 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노동 그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오랫동안 노동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노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마르크스가 노동은 착취라고 단순화시킨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마르크스의 이론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노동이 없는 사회'라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것처럼 보인다. 혁명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도 우리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바로 과학과 기술을 맹신하는 사람들이다. 한번 이러한 상상을 해보라. 서울에서는 로봇이 구두를 닦고, 일본의 회전 초밥집에서는 기계가 주문을 받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는 원거리 통신으로 움직이는 무인택시가 당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 어디 그뿐인가. 퇴근 후 태권도 운동 상대가 되어주는 트레이너는 사실 수천 개의 부품과 센서로 구성된 기계이다.

인간과 같이 인식하고 행동하는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이 우리를 대신해 일을 한다면, 우리는 이제 자유만 누리면 되는 것인가? 일하지 않아도 되면 우리는 자유로운 것인가? 일에 부담을 느끼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조차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서도 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일과 노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늘날 전 세계의 핵심적 문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일자리'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청년 실업률은 9%였다. 15~29세의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일자리는 미래를 설계할 희망이고 토대이다. 일자리가 없으면 미래를 설계할 수조차 없다. 희망을 상실하면 일본의 '사토리 세대'처럼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안분자족한다고 착각하거나, 영국의 차브(Chav)족처럼 반사회적 폭력성을 띠게 된다. 이처럼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거리에 내몰리거나 질 낮은 일자리에 종사하는 하층 노동계급은 사회에 필요 없는 '잉여 존재'로 낙인찍힌다.

문제는 바로 일자리다. 언제는 경기활성화를 위해 첨단 과학과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야단이더니 이제는 디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인상하겠다고 법석이다. 우리는 여기서 소득 주도의 장단점이나 성공 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노동과 일자리가 자기실현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조건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고용 우선의 일자리 창출에 고민해야 한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벌써 사회적 특권이 되지 않았는가.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세 가지 사회적 계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지식노동자 계층', 삶의 의미는 없더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서비스노동자 계층', 그리고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잉여노동자 계층'. 누구나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거나 아니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자기 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것이 최고의 일자리다. 물론, 이런 일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수록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일한다. 일이 비록 즐겁지는 않을지라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때로는 일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이들은 노동과 소위 말하는 자기실현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은 삶의 일부가 된다. 문제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영국의 차브가 되어 사회에 분노하거나 일본의 사토리가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는 노동하지 않는 사회가 유토피아로 그려졌는데, 이제는 노동과 일자리가 유토피아가 된 것이다. 일자리를 얻어야 비로소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면 청년실업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진우/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