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년필에 대한 애착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오래전부터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갖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가끔씩 백화점 유리관 안에 잘 모셔진 그것을 들여다만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살 것처럼 요리조리 만져보거나 글씨까지 써 본 적도 있었다. 사각거리며 단정하게 마음을 잡아 줄 것만 같은 그 느낌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아 마음이 흐트러질 때면 만년필 생각이 더 간절해지곤 했다.
얼마 전 지인들끼리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든든한 후원자들로부터 수제 만년필을 선물로 받았다. 너무 뜻밖이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받고 보니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민망스럽기만 했다. 내게는 연필이 잘 어울린다고 연필이나 깎으며 지냈는데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는지 몇 번이나 케이스를 열어 그것을 꺼내보곤 했다. 마치 어릴 적 새 구두를 사서 머리맡에 두고 방 안에서만 신어보던 그때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선물로 온 만년필은 슬며시 호주머니 속에 넣어주는 온기 같았는데 그들 또한 그러하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글을 읽어주며 다음 주를 기다려 주기도 하고, 잦은 실수에도 시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쓰다듬어 주곤 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따스하게 다가오는 이 만년필을 열어 흰 종이 위에 어떤 말을 적어볼까 고민하다가, 늘 받기만 하는데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 받은 정성들을 잘 간직하고는 있는지, 그 마음들 잃어버리기 전에 만년필에 기대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어졌다. 우리가 함께 본 눈 덮인 오름에 대해, 밤에도 푸른 눈을 끔벅거리는 바다에 대해, 깨물어보고 싶은 봄빛, 그리고 돌담길, 그 길에서 만난 돌담의 출렁거림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날 숲은 한없이 우리를 깊게 불러들이고 있었는데 그 부름에 알맞은 대답을 찾아내고 싶었다. 어린 봄 햇살 아래 만년필이 닿자마자 잉크는 남모르게 눈가를 적시는 물기처럼 조용히 번져나갔다. 누군가를 향해 가는 마음도 여기까지만 번져 갔으면 좋겠다. 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마음들,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건넬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나는 가끔 요령 없이 넘치도록 주었다가 어느 날 넘친 것을 허겁지겁 주워담으려 할 때가 많다. 만년필처럼 마음에도 뚜껑이 있어 꼭 닫아두었다가 적절할 때 슬쩍 풀어 놓을 수 있으면 삶이 덜 허허할 텐데, 나는 양은 냄비처럼 파르르 끓어올라 자주 흩어버리기만 한다. 여행 중에 고남수 작가의 '바람이 지나가는 길, 돌담'이라는 사진전에서 본 그의 작가노트가 생각났다. '예술의 목적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내는 방법에 있다'는 그의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는 부끄럽지 않은 글로 나의 자리를 찾아가리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케이스에 꽂아둔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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