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시작
나랏빚 갚기 들불처럼 번져
딥 팩터 고쳐 다시 한 번 일어서야
지금부터 108년 전인 1907년 2월 21일 오늘,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은 일제의 간교한 계략 때문이었다. 일제 통감부는 영국인 배설(E.T.Bethell)이 창설한 대한매일신보가 다른 신문에 앞서 '국채 1천300만원 보상취지'를 게재하자 이를 배일 운동이라 내심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러나 런던 데일리 뉴스 특파원으로 러'일전쟁(1904년)을 취재하기 위해 내한했다가 대한제국을 사랑하게 된 영국 남자 배설이 대한매일신보의 사주이자 편집인이어서 치외법권이 인정되니 손을 대지 못했다. 통감부의 '신문지법'을 적용받지 않는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1905년) 강제체결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하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또한 이를 영어로 번역해서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어 일제의 침략성을 세계에 알리고, 고종의 친서를 실어 일제의 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항일언론으로서의 날카로운 필봉을 꺾을 방도가 없는데다 국채보상운동까지 앞장서는 대한매일신보를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호시탐탐 탄압할 구실을 찾고 있던 일제는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라는 의연금 수납처를 만들자 무릎을 쳤다. 저거다. 바로 조작에 들어갔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의 모집금을 횡령했다는 '국채보상금비소사건'(國債報償金費消事件)을 무작정 터뜨렸다. '없는 혐의'를 만들어서 대한매일신보 주필인 양기탁을 구속하여 공판을 강행했다.
한국인들이 가장 믿었던 벗 배설 사장은 이 공판이 허위라는 증거를 제시하였고, 양기탁은 무죄로 출감했다. 그러나 후폭풍은 심각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와해일로를 걷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일제는 잡음을 일으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조선사람을 분열시키려는 검은 뜻을 품었는데 그대로 걸려든 것이다. 그래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진 국채보상운동은 제3세계의 금융채무를 갚을 수 있는 새로운 시민전략으로, 또 우리 민족에게 불굴의 정신을 심어준 운동이다. 북으로는 함남에서 남으로는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기생에서부터 어린이와 걸인에 이르기까지 빈부귀천 남녀노소 도시농촌 종교사상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참가한 거국적 애국정신운동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물려주었다.
추후 3'1운동을 발발케 한 요인이 되었고,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등을 만든 여성들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가적인 문제로 관심 영역을 확장시켰다. 서상돈과 김광제 등 민간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의 전국화로 인해 대구는 '한국 기부문화의 1번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23일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기념식이 열린다. 이제 국채보상운동은 또 다른 역사에 도전한다. 대구의 첫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하는 것이다. 물론 달성 도동서원이 전국의 서원들과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을 한 것은 있지만 대구 단독 신청은 처음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대구가톨릭대학 안중근 연구소, 대구 이상화기념사업회와 손잡고 시민정신 강화를 위한 '민립의숙'을 시작하였다. 대구의 3곳 민간단체가 시작한 민립의숙과 같은 시민정신교육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서 우리나라를 위기로 몰아넣는 사회관습적 경제심리적 딥 팩터(deep factor, 심층적 요인)들을 개선해나갈 때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다.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딥 팩터로는 대립과 갈등의 정치구조와 불완전한 자본주의 그리고 만연한 공직기강 해이와 부정부패 등이다.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 국채보상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안의 딥 팩터들을 말끔히 씻어낼 때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심의실장 겸 특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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