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입력 2015-01-28 05:00:00

6월이었던가, 7월이었던가. 청마루에 걸터앉은 할머니의 모시 저고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한여름이 막 시작되려는 그 어느 때였던가 보다. 손바닥만 한 이파리를 무성하게 달고서 하얗던 꽃들을 후두둑 떨어뜨리던 감나무. 그 나무 아래 서늘한 바람에 이마를 타고 흐르던 꾀죄죄한 땟국물이 엉겨붙는 것도 모른 채, 졸음에 겨워하던 오누이는 스르르 단잠에 빠져들었다. 먼 산에서는 뻐꾸기들이 연신 느릿느릿 울음을 울었고.

내게 남아 있는 어린 누이에 대한 기억은 감꽃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서 서늘한 그늘을 이기려고 서로를 품에 꼭 품으며 자던 그 달콤한 낮잠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같이 놀아주기를 바라고는, 동무들과 산들을 휘젓고 다니는 나를 쪼르르 쫓아다니던 한때 유년의 시간들로 이어진다. 선머슴처럼 개구지면서도 이은하나 혜은이의 노래를 곧잘 따라부르며 발랄했던 누이.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읽은 문학작품 속에서의 누이는 대체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아마 우리의 생활사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남성우위의 관습 때문일 것인데, 특히 김승옥의 소설에서 마주한 누이는 우리 근대사회의 슬픔을 응집해 놓은 듯한 상징을 내게 불도장 자국처럼 남겨 놓았다. 그래서 제목도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였던가. 소설 속, 나와 어머니에 의해 도시로 보내졌던 누이가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침묵으로 일관하자, '도시에서는 항상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할퀴고 지나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에게 저런 침묵을 떠맡기고 갔었을까.' 안타까워하는 소설가의 시선에서 나는 또 대학시절 한 친구의 얼굴도 떠올린다. 가난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하며 대구 3공단에서 미싱을 밟는 누이 생각에 소주잔 기울이다 말고 눈물을 삼키던 그. 돌이켜 보면 나의 누이 역시 맏이인 나를 위해 자기의 욕심을 한껏 부려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서울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는 내게 농담인 듯 비단 구두 사오라며, 월급에서 저축할 돈을 얼마간 떼어 용돈붙이로 보내던 그녀. 하지만 이런 누이에게 나는 언제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는 말 한번 진심으로 내어본 적이 있었던가.

마트 계산대에서, 공장 자동 컨베이어에서, 입시학원 칠판 앞에서, 아니면 낯선 사무실의 회계 장부 안에서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을 나의 누이들은 지금 많이 아프다. 황혼녘, 해풍이 부는 강둑으로 그녀를 불러 바닷바람에 도시에서 입은 상처를 씻어내길 바랐던 소설가의 마음처럼, 나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의 누이를 감꽃 피는 나무 아래로 다시 데려와 꼭 껴안으며 위로해 주고 싶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져 버린 무관심을 이제는 그만 털어버리고 싶다.

이성호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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