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 '짜릿', 양김 단일화 실패 '회한', 경제민주화가 시급한 과제
백발의 이강철(67)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꼿꼿했다. 말투와 눈빛은 20, 30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목소리는 낮고 온화했다. 하지만, '변혁' '자유' '민주' 등의 단어를 표현할 때는 목에 힘이 들어갔고 강렬함이 묻어났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7년여 동안 치른 옥고로 단련된 정신력일까.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정신이 퇴색되지 않았을까. 보수정당의 본산인 대구에서 5차례나 무모한(?) 출마와 낙선을 거듭한 경험에서 온 강인함과 여유일까.
그에게도 늘 실패만 있지는 않았다. 비록 본인 선거에서는 모두 참패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은 자신에게도 가장 큰 승리였다. 참여정부 시절 시민사회수석과 정무특보 등을 맡으며 노 전 대통령 측근 실세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역시 노무현 대통령 집권이었고, 가장 회한이 남는 것은 양김(김대중,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였다고 꼽았다. 2005년 10월 대구 동을 재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 전 수석. 10년 동안 평범한 가장으로, 외손주와 뛰노는 할아버지로 돌아간 그에게서 지난 정치역정과 근황을 물었다. 박근혜정부에 대한 평가와 청와대 문건 유출에 대한 소견도 들어봤다.
-모든 혐의가 조작된 것으로 밝혀진 민청학련 사건으로 생존자 중 가장 오래(7년 6개월) 복역했는데, 당시 시대적 상황과 배경은.
▶1970년대 초반 산업화 과정에서 '자유'가 억압받던 시절이었다. 당시 민주화 세력 중 노동계는 거의 없었고, 재야 일부와 대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유신정권은 중앙정보부(중정) 때문에 유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정은 민주화 세력 중 학생들을 뿌리 뽑기 위해 '빨간 것'(간첩)을 만들었다. 정치권은 이철승 씨를 시켜 모두 '사쿠라'로 만들었다.
정권은 당초 윤보선 전 대통령이 개입하고 지학순 주교가 돈을 대고 박형규 목사가 나서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만들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민주화와 시국 얘기를 하던 혁신계 사람들을 민청학련의 배후, 인혁당 재건위로 몰아갔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억지로 간첩으로 몰다 보니 고문을 너무 심하게 했고, 이것이 들통나니 일부는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하고 곧바로 집행해버렸지. 강신옥 변호사는 재판관들에게 '나치 재판관들이 2차 대전 끝난 뒤 전범으로 붙잡혀 사형도 당했다'는 식의 예를 들며 항의하다 법정에서 바로 구속되기도 했다.
-복역으로 인해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아버지가 대구에서 섬유공장을 하고, 오토바이골목 근처에서 미니버스를 갖고 원사(실) 점포를 할 정도로 형편이 괜찮았는데, 내 옥바라지로 집안이 망했다. 7년 6개월 동안 서울, 대구, 광주 등 전국의 교도소를 옮겨 다녔다. 5남 2녀의 둘째인데, 장사하는 형이 나한테 돈 10만원을 준 것 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6개월을 살았어. 그때는 영장도 필요 없던 때였어. 뒤늦게나마 진실이 드러나 명예회복이 되고,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돼 부모님과 형제들한테 보상금이 지급된 것이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줬다.
-출소 후 재야활동을 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여 년 동안 대구에서 5번 출마해 떨어졌다. 정치는 왜 했나.
▶사회변혁이지 뭐. 민주 정권을 만드는데 시민운동, 재야운동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사회변혁을 위해 정치권력을 잡아야 했다. 1980년대 후반 직선제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분출됐을 때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양김 단일화가 최대 현안이었는데, 이를 위해 만든 당이 한겨레민주당이다. 제정구, 예춘호 이런 분들과 공동대표가 돼 당을 만들고 단일화를 위한 3자 교섭까지 갔다. 결국 단일화에 실패한 뒤 독자 정당으로 처음 출마했다.
-20여 년 정치활동 중 가장 회한이 남는 것은.
▶양김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단일화가 됐다면 우리 역사를 20, 30년 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대선 정국에서 재야세력인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도 사실 분열됐는데, 나도 '비판적 지지'를 너무 강하게 했다. 6월 항쟁 때 대구에서 수만 명이 길거리에 나오는 등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강해 양김 단일화도 분명히 될 것으로 믿었다. 현실정치를 너무 몰랐다.
1987년 대선 3일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 포항 유세가 있었는데, 문익환 목사와 내가 DJ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갔다. 단일화는 실패했으니 좀 더 진보적인 DJ가 후보를 양보할 것을 강력히 권유하기 위해서였는데, 문 목사는 별다른 얘기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선거 승리 당위성'에 대한 DJ의 설명만 듣고 방문을 나서야 했다. 죄책감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 탄생의 주역이기도 한데, 참여정부 시절 지역을 위한 역할은?
▶노 대통령의 당선은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지역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역사에 획을 그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마다 창구 역할을 할 사람을 정했는데, 대구경북의 창구 역할을 나한테 맡겼다. 중앙부처가 통상적으로 하는 행정 외에 특별한 지역현안을 챙겼다. 예를 들면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대구 유치를 위해 당시 대구시장의 요청에 따라 대회 유치지 선정투표가 이뤄졌던 아프리카에 문화관광부장관을 파견하도록 하기도 했다. 대구를 오송과 함께 첨단의료복합단지로 지정하게 한 것을 비롯해 대구도시철도 3호선 설계용역비 반영, 경부고속도로 팔공산IC 건립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 수석을 지냈는데, 최근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 의혹을 담은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어떻게 보나.
▶청와대의 공식 보고서가 허위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국정원이나 경찰, 검찰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찌라시' 수준의 소문을 모아놓은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조사한 뒤 올리는 공식보고서는 여러 검증을 거쳐 내용의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청와대 파견 경찰이 내용을 마구 조작해내고, 검찰 출신의 공직기강비서관이 확인 없이 그대로 보고할 만큼 청와대 내부시스템이 허술하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근혜정부에 대해 평가한다면.
▶언론에서도 지적하듯 '소통'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40년이 지났고 국민의식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아직도 1970년대 권위주의 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기회가 있기 때문에 국민과의 소통을 조금씩 높여나가야 한다.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 경제 민주화가 절실하다. '경제 민주화'와 '성장'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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