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약속

입력 2015-01-10 06:04:16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꼭꼭 약속해~ 도장, 복사, 사인."

요즘 아들 녀석 해율이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새끼손가락을 걸자고 난리다. 엄마를 못 믿겠다는 거다. 엄마가 분명 크리스마스 선물로 '로보카 폴리'를 사준다고 했는데 슬쩍 넘어갔기 때문이다.

며칠 전 신년회 회식이 있어 시어머니에게 해율이를 맡기고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아들은 불안해하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엄마가 오는 길에 초콜릿 사다 줄게"라며 일단 바쁜 마음에 평소엔 절대 안 된다던 초콜릿을 사오겠다고 나도 모르게 말을 뱉어버렸다. 해율이는 의심의 눈초리로 날 한번 보더니 대뜸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아이가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 내가 아이를 쉽게 다루기 위해서 새끼손가락은 하나의 좋은 수단이다. 특히 나 같은 워킹맘에게는 더욱 그렇다. 매일 아침 나는 새벽 5시에 잠든 아들을 뒤로하고 출근한다. 이때부터 난 앵커 이정미이다. 방송을 마치고 회의도 끝내고 이른 저녁에서야 집에 돌아가면, 그때부터는 육아를 책임지는 가정주부, 아니 슈퍼맘으로 변신한다.

회식이 끝나고 거나하게 취해 집 현관에 도착했는데, 그 순간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아, 초콜릿!"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추웠고, 귀찮았다. 이미 아들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얼음장 추위를 뚫고 수백 미터 떨어진 편의점까지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갓 두 돌을 지난 아들은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을 잊지 않는다. 아직 말하는 법도 잘 모르는 아들은 약속을 하고 지키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을 몸으로 먼저 익혔다. 내가 그 늦은 시간의 취중임에도 발길을 돌렸던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 녀석을 새끼손가락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세 살배기의 진리'에 첫 배신감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새해에는 어김없이 약속이 쏟아진다. 술을 줄이겠다, 살을 빼겠다는 개인적인 약속부터 정부의 책임자와 여당과 야당 수장들의 비장한 각오들도 매년 반복된다. 청와대에서는 '경제 회복'과 '안전 사회'를 화두로 꺼냈다. 정치권은 '혁신'과 '민생'이라는 오래된 레코드판을 다시 돌리고 있다. 물론 꼭 해야 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벌써 불안해지는 건 왜일까?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아서일까? 도장도 복사도 사인도 하지 않아서일까?

2014년 청와대 신년사에는 "국민의 생활이 좀 더 풍족해지고, 행복한 삶이 되도록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명시돼 있다. "경기 회복의 불씨를 반드시 살려내서 경제를 활성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겠다"고도 나와 있다. 그런데 지난해 어떠했는가. 내 삶은 전혀 풍족해지지 않았고 경기도 경제도 나아지지 않았다. 난 가을이면 만기를 맞아 더 불어난 전셋값에 두렵기만 하다. 애는 커 가는데 월급은 몇 년째 동결이고 부모님은 허리, 다리 쑤신다고 은근슬쩍 말을 흘리시니 용돈을 올려 드려야 하나 걱정이다.

이 정부가, 정치권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난해에도 못 지켰다고 이번에도 뻔할 것이라는 비약적 논리를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누군가의 잘못이라는 얘기를 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약속은 결코 혼자서 지킬 수 없다. 약속이 실행되려면 모든 당사자들이 달려들어야 한다.

초콜릿을 사오는지 끝까지 확인하는 세 살배기처럼, 안 사오면 대성통곡하며 엄마를 결국 움직이게 만드는 어린 아들에게 나는 오늘 또 하나의 진리를 얻는다. 그런 아들이 두려워서라도 오밤중에 초콜릿을 사러 가는 것 말이다.

이정미/MBN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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