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nuts-rage'에 대한 단상

입력 2014-12-16 07:00:12

20여 년 전 대한항공 기내에서 마카다미아넛을 '선물' 받은 일이 있다. 유학 시절 잠시 했던 아르바이트가 인연이었다. 자신들의 시내 관광을 도왔던 여행 가이드의 얼굴을 용케 알아본 승무원의 작은 성의 표시였다.

마카다미아넛은 물론 봉지째였다. 하지만 이코노미석에서도 끝자리에 앉은 '미생'(未生)에게는 이마저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먹어보는 견과류의 고소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1등석 승객이 된 듯한 착각도 물론 아니었다. 그저, 세월이 흘러서도 소매깃 스친 시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엊그저께 외국 출장을 다녀왔다. 하지만 마카다미아넛에 얽힌 따스한 추억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우리의 날개'를 이용하지 않은 불찰(?) 탓이다. 오히려 해외 체류 도중 TV'신문을 통해 접한 'nuts-rage' 소식은 마카다미아넛의 이미지만 씁쓸하게 만들었다. 재벌 3세의 항공기 회항 지시가 땅콩(nut)에서 비롯됐다는 팩트도 담겨 있지만 '말도 안 되는(nuts) 분노'라는 외국 언론들의 조롱 섞인 표현에 낯이 뜨거워질 수밖에….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의 폭언'폭행에 대한 기내 사무장과 목격자인 승객의 생생한 증언이 뒷받침되고 있다. 검찰 조사에서 사무장은 "그 모욕감과 인간적 치욕은 겪어보지 않은 분은 알 수 없다"고 토로했고, 승객은 "(자신 역시) 큰 스트레스를 받아 기내에서 눈치를 볼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게다가 조 부사장을 감싸기에 급급했던 대한항공 측은 거짓말도 모자라 '증인'들에 대한 회유에 나선 것으로 나타나 할 말이 없게 됐다. 회사 측은 사무장에게는 "국토교통부 담당자들이 대한항공 출신이라 회사 측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겁박했고, 승객에게는 "사과를 잘 받았다고 언론에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나라 안팎에서 지탄을 받을 만한 요소는 빠짐없이 갖춰진 셈이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에서도 교훈은 찾아야 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상속녀의 철없는 짓거리가 잘못된 가정교육 탓이든, 분노조절장애 탓이든, 음주에 따른 주사였든 간에 마녀 사냥의 카타르시스만 남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땅콩 부사장' '라면 상무' '신문지 회장'은 언제든 또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은 압축성장의 후유증 탓이란 분석이 많다. '내가 누군지 알아?' 이 한마디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확인하고 싶은 천민자본주의의 단면이라는 해석이다. 조현아 부사장 역시 1등석에 자신만 앉았더라면 '객기'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SNS 댓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슈퍼 갑(甲)질'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든 갑으로서 횡포를 부릴 개연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는 한국 직장인 10명 중 9명이 '갑질을 당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스스로는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위력'(威力)을 앞세우지 않았다면 나타날 수 없는 응답률이다. 윗사람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만 갑질을 저지르랴?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려온 청마의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새해에는 모두가 상대를 주의 깊게 배려해 갑질한다는 비아냥을 듣지 않는 해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설혹 장삼이사(張三李四)에 지나지 않는 필자에게도 갑질을 당했다고 느끼신 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정중히 사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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