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 조선과 일본, 그 사이에 서 있었던 작가 염상섭

입력 2014-11-22 08:00:00

한국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염상섭의 '만세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만세전'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답하지 못한다. 모두가 염상섭의 '만세전'을 이렇게 저렇게 들어서 알고는 있으나 '만세전'에 대한 정보는 단지 염상섭의 소설이라는 것 그뿐이다. 이 난해한 제목의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다. 1919년의 삼일만세운동 발생 이전이라는 의미이다. 삼일만세운동, 즉 기미독립운동은 192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투쟁이 시작된 3월과 4월 두 달 동안만 해도 전국에서 850회나 일어났고 진압을 위해 일본군 4천여 명이 투입된 대규모 반일 운동이었다. 의외로 염상섭은 만세운동의 열정적 시간을 두고, 만세운동 이전 시기를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

삼일만세운동 직전의 조선은 어땠을까. 우리가 어린 시절 삼일절마다 불렀던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로 시작되는 그 감동적 노래를 떠올릴 때, 당연히 그 무렵의 조선 전역은 투쟁의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의외로 염상섭이 '만세전'에서 그려내는 조선의 현실은 기대나 상상과는 다르다. 1919년 만세운동 직전인 1918년 겨울, 동경 유학생 이인화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을 위해 일본 동경을 떠나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일본 동경에서 출발한 이인화의 여정은 고베를 거쳐,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넘어 부산에 도착하여, 김천을 거쳐 경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여정 동안 이인화는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의 현실을 마주 대하면서 구토를 일으킬 정도의 염증을 느낀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 주종을 이루고 있던 조선의 작가, 지식인들이 일본과 조선을 대하는 감정은 복잡했다. 유학을 통해 오랜 기간 일본을 경험하면서 이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에 대해서 분노와 열망, 선망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본은 조선을 폭압하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지만, 아시아 최초로 근대를 이루어낸 놀라운 나라이기도 했다. 조선에 대한 이들의 마음 역시 이처럼 이율배반적이었다. 폭압당하는 가련한 조선 민족에 대한 연민과 이런 방식으로밖에 역사를 이끌어오지 못했던 조선민족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가 이들의 마음에 함께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이인화라는 인물의 여정에는 일본과 조선,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었던 이러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불안과 갈등, 좌절이 담겨 있었다.

중학교 시절 일본 유학을 떠나 민감한 청년기의 8년을 일본에서 보낸 염상섭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물론 후대의 사람들은 염상섭이 민족의 현실에 대해 더 강하게 자각하고 강력한 대응책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 동경 거리를 걸으면서 제국의 힘에 압도당해보지도, 조선의 무력한 현실에 절망해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속 편한 '말'일 뿐이다. 때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냉혹한 현실을 현실로서 마주 대하는 것이 더 큰 용기와 힘을 필요로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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