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18>박노욱 봉화군수-부인 서영숙 씨

입력 2014-11-10 07:00:15

30년 한결같은 동행

박노욱 군수의 멘토 부인 서영숙 씨가 오랜만에 단풍이 물든 군청 앞 잔디광장에서 담소를 나눴다.
박노욱 군수의 멘토 부인 서영숙 씨가 오랜만에 단풍이 물든 군청 앞 잔디광장에서 담소를 나눴다.

박노욱(54) 봉화군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봉화읍 해저리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농업 전문가로 살아오다 무투표로 도의원과 재선에 성공한 '농민군수'다.

봉화읍 내성초교와 봉화중'고를 졸업한 박 군수는 지역에서 4-H 회원과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농업인들의 대변자로 살았다. 경북도 세계농업포럼 운영위원과 우수농산물 심의위원 등도 지냈다. 박 군수가 정치에 입문한 건 지난 2006년 지방선거다. 그는 제8대 경북도의원에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됐다. 2010년 봉화군수에 당선됐고, 지난 6'4지방선거에서는 무투표로 재선 군수에 당선돼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박 군수에게는 멘토와 길라잡이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즐비하다. 산골학교 시절 박 군수의 총명함을 살피고 중'고교 진학을 이끌어줬던 은사님들, 농업경영인 시절 함께 고생했던 숱한 친구들, WTO 반대 투쟁에서 힘을 보탠 동료들, 정치인으로 변신을 도와준 지인들과 많은 인연이 모두 박 군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멘토들이다.

하지만 박 군수가 으뜸 멘토로 꼽은 사람은 평생의 반려자로 살아온 부인 서영숙(53) 씨다. 삶의 고비 때마다 곁에서 힘과 용기를 줬다고 했다. 새로운 인생의 길에서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오롯이 자신을 위해 손 잡아준 사람이다.

◆대학진학 좌절 그리고 절치부심

박 군수는 지역사회의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 암투를 특유의 뚝심과 성실함, 꼼꼼함, 철저함으로 극복했다. 봉화고를 마친 박 군수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홀어머니를 두고 집을 떠날 수는 없었다. 박 군수는 이때부터 집안 농사일을 도맡으며 농민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농사일은 순조롭지 않았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매번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농사를 지었고, 소득이 조금씩 쌓이면서 농업인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건강하던 어머니가 저혈압으로 쓰러진 뒤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년 만이었다. 26살의 청년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어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닥쳐온 충격 앞에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2년간 집 밖으로만 나돌았어요. 그때 아내가 불평 없이 잘 견뎌주었죠. 옆에서 지켜봐 주며 위로해준 것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순탄한 농업인의 길과 굴곡 많았던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싶어요."

◆고비 때마다 힘이 돼준 아내

박 군수와 서 씨의 만남은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22살에 새마을청소년회(4H) 활동을 하면서 행사장에서 우연히 서 씨를 만났다. 당시 박 군수는 고교 졸업 후 농사를 짓고 있었고, 서 씨 역시 물야면에서 4H 여성회원으로 활동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여성 4-H 회원들이 많았지만 유독 아내의 4-H 활동이 짜임새가 있었어요. 잘 정돈된 차림새와 온화한 성격에 마음이 흔들렸죠." 박 군수의 저돌적인 구애가 시작됐다. 보다 못한 당시 농촌지도소장이 정식으로 만남을 주선하면서 본격적인 사랑이 싹텄다.

서 씨는 약혼식을 올린 후부터 군 복무 중이던 박 군수를 대신해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결혼 후에도 농업경영인의 아내로서 집안일을 도맡으며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박 군수가 2003년 농업경영인 경북도연합회 회장을 맡아 농협개혁과 한'칠레 FTA반대운동의 선봉에 섰을 때나, 2005년 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직을 맡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한'칠레 FTA 투쟁을 위해 멕시코로 떠났을 때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조했다.

박 군수는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아내는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단식투쟁과 시위, 감금 등으로 소식이 끊기면 남몰래 애간장을 태웠겠지만 한 번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좌절하는 제게 '남자가 나라 농업을 책임지겠다고 결심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그것도 견디지 못한다면 뭘 할 수 있겠느냐'고 충고했죠."

◆함께여서 성공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82년 2월 17일 결혼했다. 농업인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다. 박 군수가 4-H 활동을 하고 농업경영인 경북도연합회장과 중앙연합회 부회장을 맡아 전국을 누빌 때도 1년을 하루같이 새벽밥을 지으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서 씨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1남 2녀를 키우면서 농업경영인 대표의 아내로 고단한 삶을 견뎌냈다.

"사실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모를 정도로 일에만 매달렸어요. 돈은 한 푼도 벌어다 주지 못하는데 아내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힘든 농사일을 하고, 가축을 키우며, 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웠지요. 단 한 번의 섭섭함이나 불만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박 군수는 당시 얘기를 하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농업경영인회장 출마 3번, 경북도의원, 군수 출마 등 각종 선거에 나설 때마다 힘든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단한 삶을 홀로 참고 견디며 내조해 온 사람입니다."

서 씨는 1982년 전국 1호 농민 여성후계자로 선정된 후 한우 7마리로 시작해 현재 200마리의 한우 농장으로 키워냈다. 매년 1만8천㎡의 논도 경작하는 억척 살림꾼이다. 박 군수가 농업경영인에서 정치 지도자로 탈바꿈할 때도 서 씨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새벽부터 후보자의 아내로 표밭을 누비면서도 자신은 철저히 후보자인 남편 뒤에 숨었다. 모든 공을 남편에게 돌렸고, 격려와 칭찬은 남편이 듣도록 했다. 그림자 내조는 박 군수가 민선 단체장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남편인 박 군수가 부르짖는 '산림휴양도시 청정 봉화'를 위해 박 군수가 직접 챙기지 못하는 여성계와 문화계는 물론 어두운 곳, 구석진 곳, 소외된 곳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군수인 저보다 더 인기가 좋다는 얘기도 들려요. 가슴 한편엔 든든함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밖에 일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단소리보다 쓴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아내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에겐 든든한 후견인이면서 멘토입니다."

봉화 마경대 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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