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인물] 일본 부인은 문경, 자신은 평양에 묻힌 박열

입력 2014-10-27 07:19:40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박열) "우리를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다."(가네코 후미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탄광촌에서 착취당하는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 자랐고, 다니던 보통학교의 조선인 교사가 일제 압력으로 거짓 교육을 했다는 눈물 어린 고백에 충격을 받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며 그만두고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박열(朴烈·1902~1974). 일찍 항일에 눈을 떴고 해외 항일투쟁을 위해 1919년 10월 일본에 갔다.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하고 조선 유학생들과 '흑도회' '흑우회' 같은 항일 사상 모임을 만들었다. 1922년 2월엔 자신의 시를 보고 공감한 '운명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 결혼, 평생 동지가 됐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제의 조선인 학살만행과 조선인 검거 선풍으로 두 사람은 체포됐다. 조사과정에서 폭탄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일본 왕 암살 모의라는 '대역사건'을 조작, 두 사람을 옭아매 1926년 3월 사형을 선고했다. 가네코는 그러나 1926년 7월 형무소에서 자살로 삶을 마쳤다. 1945년 오늘 22년 2개월 감옥생활에서 석방된 박열은 1950년 6'25전쟁 때 납북,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가네코는 남편 고향 문경에서 기다렸으나 끝내 합류하지 못했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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