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으로 산 무명배우 역할, 제대로 몰입한 것 같아요
'설송김'.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다 안다. 배우 설경구와 송강호, 김윤석을 지칭하는 '단어'다. '흥행보증수표' 배우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요즘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설송김'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연기 잘하는 배우를 꼽을 때 '설송김' 더하기 누구라고 하지, 이들 중 누구를 빼지 않는다. 그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크다.
과거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주인공들. 둘째 가라면 서러울 연기자들의 과거 이야기는 풍문으로만 들어도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영화계에서만 활동해서인지 연극배우 출신인 이들의 무대 위 모습은 기억 속에서 잊혔다. 설경구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에 잠시나마 그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관객을 찾는다.
30일 개봉 예정인 영화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다. 대한민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1972년, 회담의 리허설을 위한 독재자 김일성의 대역으로 선택된 무명 연극배우 성근(설경구)과,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아들 태식(박해일)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지만, 무명 연극배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 그를 만날 수 있다.
영화는 '첫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의 대역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신선한 설정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설경구와 박해일의 부자(父子) 연기도 기대감을 높인다.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에서 오랜만에 연기하기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연기가 더 힘들었어요. 감독님을 많이 괴롭혔죠. 얼굴을 안 볼 지경까지 갈 정도였다니까요. 그래도 내가 의지할 사람이 감독님밖에 없었어요. 사실 내 장면이 다 편집돼 날아갈 뻔했죠. 생각해보니 연기하면서 엄청나게 퍼부었던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답을 구하려고 했죠.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성근은 극 중 혹독한 고문을 견딘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입이 무거워야 하기 때문이었다"는 고문기술자들의 말을 들은 그는 결국 김일성 대역이라는 역할을 따낸다. 김일성의 대역이니 뼛속까지 주체사상 등 북한이 주장하는 것들에 동화되어야 했다.
김일성 대역 연기는 대단하다. 말투는 기본, 표정과 손짓 하나까지 김일성을 따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을 것 같다. 그는 "김일성 역할이었다면 이번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김일성 대역이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고, 재미있겠다 싶었다"고 웃었다.
특히 "손 연기를 위해 많이 연습했다"는 그는 "이준혁이라는, 마임을 잘하는 배우가 도와줬다. 또 과거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던 김일성 동영상을 제작사에서 구해줘서 그걸 보고 연구를 했다. 현장에서도 이해준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떠올렸다.
성근은 남북정상회담이 실패로 돌아가 정상 생활로 돌아와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다. 나이 들어서도 자신이 곧 김일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다. 30년 가까이 김일성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다. 그 모습은 짠하다.
오래 연기해온 설경구에게도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실제 경험이 있을까?
그는 과거 영화 '박하사탕'(2000)을 언급했다. 삭막했고 두려웠던 1980년대를 살았던 김영호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고, 흥행한 작품이다. 영화 '꽃잎'과 '유령' 등에서 단역으로 나왔던 설경구는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설경구는 "당시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경험이 없었다. 역할에 단단히 빠져 있었다. 평상시에도 영화에서 입던 옷을 입고 6개월 정도 생활했다. 촬영이 끝나고 인터뷰를 하다가 울기도 했다"며 "'박하사탕'은 나에게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한 영화여서 좋았지만, 힘들기도 한 작품이다. 나중에는 모든 영화와 비교되면서 힘들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그때 참 역할에서 못 빠져나왔구나 싶다"고 회상했다.
후반부 노인의 모습도 표현해야 했다. 아들로 나온 박해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특수 분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해일이 정말 많은 도움을 줬어요. 박해일이 '은교' 때 심하게 분장을 했잖아요. 나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죠. 내가 어떤 심리를 가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의지를 많이 했어요. 덕분에 즐겁게 연기했죠."(웃음)
설경구는 박해일과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아 우려됐을 법하다는 말에는 "주변의 우려와 달리, 박해일을 보면 아기 같은 느낌이 든다. 박해일이 아닌 이 나이의 다른 배우였다면 몰입하는 과정에서 어려울 수 있었을 것 같다"며 "감정적인 몰입에서는 서로 이야기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박해일이라 수월했다"고 후배를 추어올렸다.
부자 관계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독재자'는 관객과 배우 상관없이 모두에게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배우 설경구에게도 마찬가지다. "저희 세대는 아버지와 어떤 갭이 있어요. 관계가 어려웠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이도 아니었죠.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화하는 것은 아니에요. 몇 년 전 일인데 아버지가 문득 전화해서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집에서 용돈 받고 대학까지 다녔는데 괜히 화가 났어요. 아버지가 '하느라고 했는데 미안하다'고 한 말이 추억거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를 보니 갑자기 떠오르네요."
최근 영화 '소원' '스파이' '감시자들' '타워'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였던 설경구는 이번에도 탁월한 연기력을 선사한다. 모든 연기가 그러하겠지만, '나의 독재자'에서도 제대로 몰입했다. 살이 찐 김일성 대역을 위해 체중도 늘려 가야만 했다. 자장면을 먹으며 실제 살을 찌웠다. 극 중에도 등장한다. 자장면을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은데, 그는 "지금도 자장면은 좋아한다"고 웃었다. 이유는 "현장에서 급조된 자장면은 불어 있기도 하고,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기를 위해서 당연히 '맛있게' 먹어야 했다. 자장면이 왜 싫어졌을 것 같은지는 영화를 보면 안다. 재미로 보는 '먹방' 자장면 신이 아니라, 눈물겨운 자장면 신이라고 꼽을 수 있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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