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만어] 훔친다는 것

입력 2014-10-21 08:00:00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스티브 잡스가 즐겨 쓴 말이다. 피카소의 말이었지만, 잡스가 자주 인용하곤 했다. 원래의 저작권자는 '4월은 잔인한 달'로 유명한 시인 T,S 엘리엇이다. '어설픈 시인은 흉내만 내지만, 원숙한 시인은 훔친다.' 여기에서 '훔치다'라는 의미는 타인의 아이디어나 성과물을 슬쩍 가져와 자기 것으로 하고, 한 단계 더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으며, 창조는 모방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마음을 훔치는 것도 나름의 창조행위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훔치는 것은 범죄행위다. 시바 료타로가 쓴 '나라를 훔치다'라는 역사소설이 있다. 살모사라는 별명을 가진 사이토 도산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간통, 배신을 통해 모시던 영주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줄거리다. 살모사 사이토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이었던, 실존 인물이다. 말년에 아들에게 배신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이래 저래 도둑질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훔치는 행위'를 오히려 권장하는 스포츠가 있다. 바로 야구다. 한때 미국의 교조적인 종교인들이 비도덕적인 '절도(steal) 행위'를 용인하는 야구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있었다지만, 도루(盜壘)만큼 야구를 박진감있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전문가들은 도루 1개가 솔로홈런보다 낫다고 한다. 발 빠른 주자가 출루하면 투수와 내야수들이 긴장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경기 흐름이 바뀐다는 것이다. 도루는 발만 빠르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센스와 슬라이딩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1984년 롯데가 당시 육상 100m 한국신기록 보유자인 서말구 씨를 코치 겸 선수로 영입했다가 한 경기도 내보내지 못한 것이 최고의 해프닝으로 꼽힌다.

야구 역사상 도루 부문 최고의 선수는 리키 핸더슨이다. 메이저리그에서 25년간 뛰면서 1천406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1982년에만 130개를 성공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대기록이다. 통산 타율이 0.279였으니 출루만 하면 2, 3루를 거푸 훔친 셈이다. 한국에는 전준호가 기록한 통산 550개다. 올해 삼성의 김상수가 53개로 도루왕을 차지했다. 삼성 선수로는 처음이다. 김상수는 날렵한 몸에 타고난 감각을 갖춰 앞으로의 활약이 더 기대된다. 무엇보다 딱딱하고 무거운 이미지를 가진 삼성이 다채로운 공격야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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