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생각하다]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한글

입력 2014-10-04 07:46:18

희극인 김병만 씨의 한글주택. 한글주택마을(주) 홈페이지
희극인 김병만 씨의 한글주택. 한글주택마을(주) 홈페이지
한글
'노앙'의 티셔츠. '노앙' 홈페이지
디자이너 이상봉의 도자기 작품. 행남자기 홈페이지
한글 '러브탁상시계' 티움몰 홈페이지
디자이너 이상봉의 도자기 작품. 행남자기 홈페이지

약 10년 전 미국 팝스타인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입은 원피스가 한때 우리나라 누리꾼들 사이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디자인이 선정적이거나 파격적이라서가 아니라 원피스에 적혀 있던 '신흥호남향우회'라는 한글 때문이었다. 그 사진은 다른 외국인들이 입은 '이상한 한글 문구 티셔츠' 사진들과 함께 우스개 누리집(유머 사이트)에서 누리꾼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한글이 새겨진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체 티셔츠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한글이 디자인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일부 의류나 집 꾸미기 소품 등에 한글의 자음, 모음이 활용되고 있고, 한글의 글자 조합 방식이 주택 설계에도 응용되고 있다.

◆스타들이 찾아 입는 한글 디자인

최근 TV 드라마 또는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티셔츠가 있다. 화려한 그림이나 파격적인 절개선은 없다. 단지 도시 이름을 박아 놓은 것뿐인 이 티셔츠의 특징은 바로 '박아 놓은 도시 이름'에 있다. 서울, 도쿄, 런던, 밀라노, 파리, 뉴욕을 영어 철자로 박아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한글 자음이나 모음이 하나씩 숨어 있다. 서울을 'SEOUL'로 쓴 것이 아니라 'ㅅEOUL'로 쓰고 'NEWYORK'을 'NEㅠYORK'으로 써 프린트해 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영어 알파벳이 내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지닌 한글 자음과 모음을 대체해 놓은 것이다. 게다가 글꼴 또한 영어 글꼴과 한글 글꼴이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어 영어와 한글의 경계가 오묘하게 어울린다. 이 티셔츠는 '노앙'이라는 의류업체가 배우 유아인 씨와 디자인 협업을 통해 만들어낸 티셔츠로 출시 직후부터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한글이 옷 디자인에 반영된 사례는 노앙이 처음은 아니다. 디자이너 이상봉 씨는 2006년 한글을 이용한 패션디자인으로 해외 패션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할리우드 스타인 린제이 로한이 그의 한글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인터넷에 화제가 되면서 해외 유명 편집숍들의 러브콜을 받았고, 유럽, 미국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후, 의류뿐만 아니라 도자기, 휴대폰 등 다양한 산업디자인 작업에 한글을 응용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면서 국내외에 한글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려왔는데, 행남자기와 협업한 그의 도자기 작품은 현재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Victoria & Albert)박물관에 영구 전시돼 있다.

◆생활소품'주택에도 한글이 등장

한글은 생활소품의 영역에서도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글꼴 디자인 업체인 '산돌 커뮤니케이션'에서 만든 인터넷 쇼핑몰인 '티움몰'(www.tiummall.co.kr)에서는 노트, 카드, 스티커 등 디자인 문구 상품들 외에도 한글 티셔츠, 명함집 등 20종 내외의 한글디자인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톡톡 튀는 문구의 엽서, 카드 등이 인기가 많다. 티움몰 관계자는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표현하고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한글로 표현하여 소비자들에게 쉽고 편하게 다가가려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글로만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이나 언어유희를 살리고 한글만이 가지는 언어의 힘을 표출해, 한글의 또 다른 이면을 보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디자인을 만들고 있다.

한글의 자음'모음 조합 개념을 건축에 적용시킨 사례도 있다. 희극인 김병만 씨는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새로운 집을 공개했는데 이 집은 집의 기본적인 형태인 ㄷ, ㄴ 형태의 블록을 이리저리 조합해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김 씨의 집을 설계하고 시공한 업체는 이 주택의 이름을 '한글주택'이라 이름 지었다. 한글주택의 박정호 이사는 "주택 건축 설계의 기본배치가 ㄷ, ㄴ 형태이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한글을 쓰는 것처럼 다양한 설계 디자인이 나온다는 데서 한글주택이라 이름 붙였다"고 말했다.

◆아직은 갈 길 먼 한글 디자인

디자이너들은 한글이 생각보다 디자인하기 어려운 글자라고 말한다. 그 이유로 한글이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쓰는 '모아쓰기'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글 글꼴은 다양하게 나오기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글의 특성이 한글 디자인의 다양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서예가 백영일 전 대구예술대 교수는 "한자 서예의 경우 입 구(口) 를 7가지 형태로 변형해 쓸 수 있지만 한글 'ㅁ'은 한 가지 종류로밖에 쓸 수 없다"며 "한글의 제자원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서체를 창조해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한글 상품이 소비자들에게 생소하다는 사실도 걸림돌이다. 티움몰 관계자는 "한글 디자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최근 들어 높아지긴 했으나 한글만으로 디자인된 상품으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유발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며 "'한글 디자인은 고리타분하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젊은 느낌의 감성적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들을 설득시키는 데 노력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한글의 형태와 원리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면 한글을 아름답게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많았다. '정병규출판디자인'의 정병규 대표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글의 '모아쓰기' 원리가 많은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 속에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디자인들이 나올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대학의 디자인 관련 학과에서 한글의 특성이나 이해를 키우는 과목을 만들어 한글의 형태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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