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재편의 현장 우크라이나 내전지역을 가다] <4.끝> 분단의 아픔

입력 2014-10-03 07:00:51

동·서로 나뉜 말리셀만치…일 년에 두 차례 닷새씩 이산가족 상봉

셀멘츠 마을에 설치된 국경 검문소를 통해 슬로바키아 쪽의 마을로 넘어가는 사람들. 작은 사진은 셀멘츠 마을을 분단시키기 위해 세워진 철조망.
셀멘츠 마을에 설치된 국경 검문소를 통해 슬로바키아 쪽의 마을로 넘어가는 사람들. 작은 사진은 셀멘츠 마을을 분단시키기 위해 세워진 철조망.
87세의 에즈바 발락은 헝가리어만 사용하면서 네 번이나 국적이 바뀌는 삶을 살아왔다.
87세의 에즈바 발락은 헝가리어만 사용하면서 네 번이나 국적이 바뀌는 삶을 살아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명확하게 가를 수 있는 기준은 없다. 단지 있다면 지리적 국경선이다. 그 외에는 모든 게 애매모호하다. 키예프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만나 가족들이 사는 곳을 물어보면 대부분 러시아나 백러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고, 혈통적으로도 모두 뒤섞여 있다. 거의 천 년 동안 혼재돼왔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혈통과 문화를 인위적으로, 물리적으로 분리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의 내전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삶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부모 자식들 간의 정이 끊어지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6월 말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마리아 바실로코프(23)는 "러시아의 벨고로드에 사는 조부모와 이미 석 달째 연락을 끊은 채 살고 있다"고 했다. 내전으로 인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면서 가족들 간에도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분리시키고자 끊임없이 추동해온 지역은 바로 우크라이나 서남부지역이다. 동부지역 대부분이 러시아민족으로 구성돼 친러시아적 성향이 우세하다면 서부지역은 폴란드민족, 헝가리민족, 루마니아민족 등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곳으로 반러시아적 정서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지역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비에트의 국경선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폴란드나 헝가리 영토의 일부를 점령했고, 이곳에 살던 민족들까지 인위적으로 소비에트 시민으로 편입시켰다.

우크라이나 서남부의 끝머리에 있는 '우즈고로드'시에서 15㎞ 떨어진, 우크라이나어로 '말리셀만치' 마을은 20세기의 역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해온 작은 마을로 지금은 두 쪽으로 분단된 상태다. 한쪽은 슬로바키아 땅이고 다른 쪽은 우크라이나에 속한다. 슬로바키아에 속하는 마을 이름은 슬로바키아어로 '벨키셀멘츠'이나 헝가리어로는 '셀멘츠'이다. 놀랍게도 양쪽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민족도 슬로바키아 민족도 아닌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헝가리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우즈고로드'시의 중심가에서 '셀멘츠' 마을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려고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네 시골장터의 버스정류장처럼 물건을 잔뜩 담은 쇼핑백을 든 남녀노소가 모여 마을로 돌아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버스 안은 헝가리말로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40분 만에 도착한 곳은 여느 평범한 헝가리 마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고, 마을 사람들 모두는 헝가리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만난 초등학교 교사인 '이보야'는 '촙'이라는 헝가리 마을에서 목수이자 농부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셀멘츠' 마을로 옮겨왔다고 했다. 현재 남편의 동생이 슬로바키아 반대쪽 마을에 살고 있어 이산가족인 셈이다. 이보야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자 60대 중반의 시어머니가 들어왔다. 시어머니는 그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마을 사정에 훤했다. 얼마 전 90세의 나이로 가장 연로한 마을 촌장이 사망했는데, 그는 평생에 다섯 번이나 국적이 바뀌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도 했다. 마을에는 헝가리어로만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가 있는데 우크라이나 학생들까지도 몰려든다면서 자랑이 대단했다.

그곳을 나와 이웃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집에는 마을에서 두 번째로 연로한 노인이 사는 집이다. 광대한 밭으로 그녀를 찾아 나섰다. 밭에 들어서자 멀리서 꾸부정한 상태로 김을 매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몸은 비록 꾸부정했지만, 얼굴은 한없이 맑은 표정이었다. 에즈바 발락(87)이 태어난 해는 1927년으로 헝가리인으로 태어났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으로 1938년까지 살아야 했다. 1938년부터 1946년까지는 헝가리 국적을 회복했지만 1946년부터 1992년까지는 소비에트 국민으로 살았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국민으로 살고 있다. 국적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녀는 다른 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단지 헝가리어만 사용해왔다. 이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주로 관공서에서 발급하는 증명서나 서류를 만들 때면 반드시 러시아어만 사용하는 사무원들과 인터뷰를 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상당한 불이익과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운명처럼 마을도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다.

마을이 동서로 분단된 해는 1946년 소비에트 세력이 들어오면서부터다. 분단선 안에 있던 집들은 모두 철거됐고 6m 높이의 담이 세워졌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던 에즈바의 많은 친척은 마을이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돼버렸고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0년 동안은 교류 자체가 완전히 금지됐다. 1955년부터 조금 사정이 나아지면서 일 년에 한 번씩 방문이 허용됐다. 지금은 일 년에 두 차례 닷새씩, 다른 쪽의 마을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허가가 내려진 상태다. 그리고 가족들 간에 특별한 길흉사가 있을 때면 언제든지 방문 허가를 내준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군이 국경을 관리하려고 주둔하면서부터는 마을 사람들의 통행이나 대화를 철저히 금지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간에 고성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소식을 전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금지됐다. 2003년에 슬로바키아 측의 마을 이장이 미국 의회에 마을의 분단문제를 호소하면서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인권문제로 심각하게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5년 양편에 국경 검문소가 설치되는 결실을 보게 됐다. 그러나 슬로바키아가 유럽연합의 솅겐국가에 포함되면서 우크라이나 쪽의 마을에서 슬로바키아 쪽으로 넘어가는 절차는 사실상 더욱 어려워졌다.

국경 검문소로 갔다. 몇 명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슬로바키아로 들어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모두 건너편 마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쪽에서 슬로바키아의 다른 편 마을까지의 거리는 70m밖에 되지 않는다. 슬로바키아 세관경찰이 이들의 짐을 검사하면서 캐묻는 모습도 보였다. 그곳을 지키던 슬로바키아 이민경찰은 "이곳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우크라이나 국민이나 유럽연합 국가와 국민뿐이다. 한국 사람은 통과할 수 없다"라면서 필자에게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재촉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을 본 다음에는 사진 촬영의 각도를 제시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말이 잘 먹혀들지 않자 다른 이민국 경찰들까지 가세해 들어왔다. 한 몸집이 큰 여자 경찰의 태도는 굉장히 적대적이었다. "사진을 찍으면 체포하겠다"는 경고까지 내리면서 마치 나를 체포하려는 듯 다가왔다. 내가 발걸음을 돌리자마자 따분한 일상을 잠시나마 반전시켰던 해프닝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마을의 분단이 조금씩 외부에 알려지고 유럽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오는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국경 검문소로 이어지는 도로 양쪽에는 많은 상점이 들어서고 있었다. 슬로바키아 쪽 셀멘츠 마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우크라이나로 쇼핑하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분단된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국경 검문소 게이트에 새겨진 문구는 지금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하나의 셀멘츠가 두 개가 됐는데, 반드시 조물주에 의해 통일되어야 합니다/ 신이 우리를 평화롭게 보호하셔서/ 우리의 희망이 이뤄져 분단된 우리가 하나 되기를 빕니다!/ 두 셀멘츠의 게이트들이 우리 마을을 더욱 가깝게 해주기를 빌면서…."

하영식 객원기자(국제분쟁 전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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