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우연찮다

입력 2014-09-29 07:38:19

요즘 방송이나 신문 인터뷰에서 '심심찮게' 하는 말이 '우연찮게'라는 말이다. "우연찮은 기회에 펜싱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 갔다가 우연찮게 오디션을 본 것이 배우 생활의 시작입니다." '만만찮다', '마뜩잖다'와 같이 쓰는 말이 많아진 영향인지는 몰라도 습관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표면적인 논리로만 따지면 위의 예에서 펜싱을 접한 것이나 오디션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문맥을 통해 '우연찮게' 뭔가를 했다고 하면 '우연히'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한다. 그냥 '우연히'라고 하면 될 것을 반의어 형태인 '우연찮게'를 사용해서 같은 의미를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과서들에서는 '우연찮게'를 '우연히'로 고쳐 쓰는 것이 올바른 어법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교과서의 설명대로라면 '우연찮다'는 필요가 없는 말이거나 우연의 반대인 '필연'을 의미할 때만 한정해서 써야 한다. 이때도 필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모호하게 '우연찮다'를 쓸 필요는 없기 때문에 결국 '우연찮다'는 말은 쓸모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우연찮다'를 표준어로 사전에 등재시켜 놓고 있으며 그 뜻을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다.'라고 모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은 우연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필연이라고 말하기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지 않다'의 형태의 말이 가진 의미 범위을 생각하면 조금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 않다'라는 말은 수학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의 여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잖다'라고 하면 '적다'의 반대인 '많다'의 뜻으로만 이해하기 쉽지만 '적잖다'는 논리적으로 보면 '적다'를 제외한 모든 영역이 해당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다'의 의미로는 잘 사용하지 않고, '적지는 않고, 많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정도의 양'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한다. 비슷한 예로 '만만하다'는 말은 상대가 약해서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할 때 쓰는데, '만만찮다'는 상대가 약하지 않아서 대등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상대가 아주 강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전에 등재된 '우연찮다'의 의미로 바로 이런 관점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다가 본 오디션으로 자신의 인생길이 달라졌다면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이나 필연에 가깝다. 그룹 동물원의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란 의미일까'라는 노래에서는 7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옛사랑을 만나고 와서 "우연이란 결국 필연의 또 다른 모습임을 알았다면 좀 더 의연한 모습으로 너를 반겼을 텐데"라고 한다. 이런 경우라면 '우연히'보다 '우연찮게'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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