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거짓과 배신 그리고 순교

입력 2014-08-30 08:00:00

김명현 신부
김명현 신부

우리 사회에 거짓이 진실을 억압하고, 사람들 간 신뢰의 근간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배신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과 배웠다는 사람들이 여상스럽게 거짓말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거짓임이 탄로 나는 모습이 다반사입니다. 정치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떤 일에 합의를 하지만 협상 테이블을 벗어나자마자 합의를 깨고 그 탓을 남에게 돌리며, 위법행위를 하고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진실을 오도하는 거짓과, 신뢰를 져버리는 배신을 일삼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접할 때 힘없는 서민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거짓과 배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도 이런 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은 베드로를 당신의 수제자로 삼으셨고 하늘과 땅의 권한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 16)라고 말하며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자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느냐는 질문에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참조 마태 26, 70'72' 74) 거짓말을 합니다.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믿었던 베드로의 거짓말과 배신에 예수님은 어떠한 변명도 저항도 하지 않으셨지만 심장이 창에 찔리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약 2주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광화문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위한 시복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 신앙이 진실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앙과 진리(진실)의 증거자(martyr)라 불립니다. 그러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순교가 일어나는 곳엔 으레 밀고자나 배교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신앙인이었거나 신자들로부터 보호나 사랑을 받던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신앙인과 신앙을 배신한 자들입니다. 순교자들은 함께하던 사람이거나 사랑과 믿음을 주었던 사람의 거짓과 배신으로 인해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이들을 원망하기보다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모습 때문에 순교를 목격하는 이들이 신앙을 갖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거짓과 배신을 일삼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조금 더 쉽게 사욕을 채우고 싶고, 끝까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통해, 약속을 지키기보다 배신을 통해 자신의 헛되고도 사악한 욕심을 채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쉽고, 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거짓과 배신의 보따리를 마음속에 꽁꽁 묶어두고 열지 않을지라도 양심이 있는 한 진실과 약속을 배반했다는 죄책은 없앨 수 없습니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마음에 엄청난 돌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삶이 무겁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짓과 배신의 장막으로 진실과 약속을 덮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둘은 죽은 것입니다. 반면 진실과 약속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과 신뢰가 거짓과 배신의 장막을 뚫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사회에 거짓과 배신이 난무할지라도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진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험하지만 정의와 평화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대구 비산성당 주임 신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