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 어휘력·사고력 손글씨 쓸 때 더 잘 나타나 "생각 정리에도 더 좋아요"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좀처럼 손으로 글을 쓸 일이 없다. 펜을 대신하는 것은 '엄지'다. 손 글씨는 시간에 쫓기는 세상에서 속도에서 밀린다.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연필 글씨의 속도가 2G라면 엄지로 카카오톡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속도는 LTE-A급이다. 손으로 쓰는 글보다 컴퓨터 자판이, 한 뼘 크기의 스마트폰 자판이 더 편하다는 사람들도 많다. 손 글씨는 여유다.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손으로 글도 쓰는 법이다. 그래서 취재진은 연령별로 각기 다른 손 글씨를 수집했다. 문제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한국 체류 기간이 5년 이상 된 외국인의 손 글씨도 추가했다. 표본의 성별은 모두 남성이다. 지금부터 중학교 1학년, 20대 대학생, 30대 직장인, 외국인의 글씨를 구별해 보자. (난이도 중상. 정답은 기사 맨 아래에 있다.)
◆ 중학생 필체, 20, 30대보다 낫다
이달 14일 대구 수성구 대륜중학교 1학년 6반 교실. 국어 수업 시간에 기자가 서류 뭉치를 들고 교실에 등장하자 학생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문제가 적힌 A4 용지를 받아본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이거 완전 쉽잖아요." 기자가 나눠준 문제의 종류는 총 세 가지로 다음과 같았다. ▷애국가를 1절부터 생각나는 대로 써 보세요. ▷자신이 아는 속담을 생각나는 대로 써 보세요. (3개 이상) ▷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써 보세요. (좋아하는 가수가 없다면 교가도 좋습니다.)
취재 목적은 컴퓨터 자판과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해진 요즘 중학생들의 띄어쓰기와 필체, 맞춤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문제를 확인하고 깔깔 웃던 학생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를 긁적였다. "쌤, 애국가 2절 뭐예요?"라며 담임교사 권오창(26) 씨에게 조심스레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남자 중학생들은 글씨를 못 쓴다'는 기본 가설을 세우고 시작한 취재였지만, 취재가 끝날 무렵 결론이 뒤바뀌었다. 20, 30대 한국 남성의 필체보다 13세 중학생이 훨씬 나았다.
학생 37명 중 손 글씨보다 스마트폰 자판이 더 편하다는 학생은 10명에 불과했다. "컴퓨터에 타자치는 것 같다" "힘이 덜 든다. 두드리기만 해도 된다" "빠르다" 등 이유가 나왔지만 나머지 27명은 손 글씨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손 글씨가 더 좋다고 답한 권대륜 군은 "손 글씨는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다 드러나지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손 글씨가 더 좋다"고 설명했다. 주변 친구들이 글씨가 예쁘다고 추천한 한정빈 군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글씨를 잘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선생님을 만났다. 국어책에 있는 내용을 공책에 다 따라 썼고, 조금씩 글씨체가 예뻐져서 칭찬도 받았다. 솔직히 컴퓨터가 편하긴 하지만 손 글씨는 쓰고 나면 성취감을 느낀다"며 깔끔하게 정리한 사회 과목 공책을 증거로 내밀었다.
◆ 시간에 쫓기는 젊은 직장인들, 악필 많다
악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 연령대는 20, 30대다.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 사용에 익숙해진 데다 요즘 시대에 직장에서도 손 글씨를 쓸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악필' 때문에 회사에서 굴욕을 당한 직장인도 있다.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정모(36) 과장은 팀장에게 간단한 업무 보고서를 제출했다가 "글씨가 왜 이 모양이냐"며 핀잔을 들었다. 정 씨는 "회사가 초등학교도 아닌데 글씨를 못 쓴다고 욕을 먹으니까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시 또박또박 글을 써서 팀장님께 갖다 드렸다"고 씁쓸해했다.
직군에 따라 다르지만 기자들도 악필이 많다. 기사를 쓸 때는 컴퓨터를, 급박한 취재 현장에서는 취재 수첩에 펜으로 휘갈겨 쓰는 경우가 많다. 항상 시간에 쫓겨 많은 양을 메모하다 보니 자기가 써놓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몇몇 젊은 기자들은 털어놓는다. 익명을 요청한 한 4년차 기자는 "사건 사고 현장에서는 여유를 부리며 또박또박 메모할 시간이 없다. 원래도 글씨를 잘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게 습관이 되면서 완전 악필이 된 것 같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또 "현장에서 취재원 이름을 메모했는데 하도 엉망으로 적어서 내가 적어놓고도 못 알아본 적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막으려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녹음 기능을 사용해 취재할 때가 잦다"고 부끄러워했다.
◆ 손 글씨, 뇌에 생각할 여유를 준다
손 글씨가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졌다. 특히 손과 뇌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12년 버지니아 버니거 워싱턴대 교수는 미국 초등학교 2학년, 4학년,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각 실험한 결과, 키보드를 사용할 때보다 손으로 에세이를 쓸 때 학생들이 더 많은 빨리 어휘를 사용하고, 더 풍부한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다른 연구 결과도 있다. 2013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단순히 문자를 읽을 때보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읽으면 두뇌 활동이 더 활발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글을 배우지 않은 5살짜리 아이들을 상대로 각각 다른 문자 수업을 듣게 했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문자를 배운 그룹의 어린이들은 문자를 눈으로만 보면서 배운 그룹에 비해 두뇌 활동이 훨씬 더 활발해졌다. 연구진들은 "뇌의 순환은 컴퓨터로 타이핑을 할 때가 아니라 손으로 글을 직접 쓸 때 활성화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뇌의 여유'를 찾기 위해 일부러 손 글씨를 쓰는 이들도 있다. 영남대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심태영(31) 씨는 "지금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데 손으로 쓸 때 생각이 확실하게 잘 정리된다. 집에 칠판 사이즈의 대형 '메모 보드'를 설치한 뒤 여기에 머릿속 생각을 풀어놓는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빈(19'골드스미스대 미디어통신학과 1학년) 씨는 글의 개요를 짤 때는 컴퓨터 대신 펜으로 공책에 기록한다. 김 씨는 "영국에서는 교수님들이 손으로 직접 쓴 과제물을 권하기도 한다"며 "강의 내용을 노트북 자판으로 쳐 필기하면 수업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손으로 글을 쓰면 강의 내용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어도 키워드만 적거나 그림을 그려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설명했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답: ①30대 직장인 ②중학교 1학년 ③20대 대학생 ④30대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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