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인형의 집을 나온 조선의 신여성, 나혜석

입력 2014-08-23 08:19:08

6월이라는 계절에 전혀 맞지 않는 겨울용 외투를 입고 세계 일주 기념사진을 찍은 나혜석-김우영 부부.
6월이라는 계절에 전혀 맞지 않는 겨울용 외투를 입고 세계 일주 기념사진을 찍은 나혜석-김우영 부부.

조선의 대표적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이 남편 김우영과 유럽 일주 여행에 오른 것은 1927년 6월 19일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나혜석 부부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나혜석은 긴 코트, 족제비털 목도리, 그리고 모자를 쓰고 목이 긴 장갑까지 끼고 있다. 경직된 표정으로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절기가 이미 여름에 들어서 있었음에도 사진 속의 나혜석은 겨울 복장을 하고 있다. 기념사진에 맞춰 그 나름 유럽 여행의 분위기를 한껏 내기 위했음이리라.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여행 이후 나혜석의 삶은 절기와 맞지 않는 사진 속의 자신처럼 그녀가 속한 사회에서 엇나가기 시작했다.

파리 체재 동안 천도교 대표였던 유부남 최린을 만나 격정적 사랑에 빠진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이 사랑의 에피소드는 파리 유학생 사회를 넘어, 조선사회에도 퍼졌고,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였던 남편 김우영이 이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이혼과 더불어 세 아이들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믿었던 최린조차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나혜석의 인생은 파국을 향해 달려갔다. 과연 세간의 말처럼 나혜석의 삶의 파국이 단지 최린과의 불륜 때문이었을까.

나혜석의 작품 중에 '인형의 家'(1921)라는 시가 있다. 여성의 자유와 해방 문제를 다룬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을 나혜석이 시로 재창작한 것이다. 이 시에서 나혜석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갈망하고 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가치 /내게는 신성한 의무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져//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김우영과의 11년의 결혼 생활 동안 나혜석은 세 아이를 낳았고, 변호사의 아내로서 외교관의 아내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언제나 또 하나의 나혜석이 있었다. 조선 여성 최초로 조선미술전에 입선한 화가이며, 문인으로서의 열정적 내면을 지닌 예술가 나혜석이다. 적어도 유럽 여행 직전까지 나혜석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자기를 위태롭기는 하지만 긴장감 있게 잘 유지해가고 있었다. 예술과 자유를 향한 그녀 내면의 열정이 아무리 강렬했다고 해도 1920년대 조선의 보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 열정은 제어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유럽 여행에 오른 그 순간부터 나혜석은 모든 의무와 윤리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 내면에 위태롭게 눌려 있던 모든 열정들이 한순간에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혜석이 머문 곳이 특히나 유럽의 파리가 아니었던가.

자유롭고 예술적인 파리의 공기를 마시면서, 나혜석은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찾아가고 있었다. 억압되었던 열정과 욕망이 현기증 나도록 급격하게 분출되던 그 시점에 최린이 바로 나혜석 앞에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자기 내면의 열정, 욕망에 부응한 결과로 나혜석에게 남겨진 삶은 참혹했다.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행려병자로 용산의 한 시립요양원에서 적막하게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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