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아픔을 끌어안고 가는 자, 누가 되어야 하나?

입력 2014-08-19 11:16:45

고대 로마군을 묘사한 영화나 그림을 보면 나무 작대기를 다발로 묶은 원통 가운데 도끼나 칼날을 끼워둔 기묘한 물건을 안고 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로마 사람들은 '파스케스'(fasces)라고 불렀다. 동양권에도 '회초리 한 개는 꺾어도 회초리 여러 개는 꺾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파스케스가 상징하는 것은 '단결에 의한 힘'이었다. 이 상징물은 기원전 6세기, 지금의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 이남에 존재했던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기원했으며 고대 로마로 흡수되었다. 이후 파스케스는 집정관이나 호민관 등이 가진 권력과 권위, 즉 '공권력'을 뜻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초반, 파스케스가 태동한 바로 그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 언론인 한 명이 극우 노선으로 전향한다. 1919년에 그는 파스케스를 자신이 당수로 있던 당의 공식 상징물로 지정한다. 그의 이름은 베니토 무솔리니였고 그의 당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Fascismo Italiano)'이었다. 파시즘이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파스케스에서 어원이 출발하여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공동체' 혹은 '조합'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력의 뜻에 반하는 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공공의 적으로 상정하여 그 반대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완벽한 일치상태에 이르려는 욕망을 지칭하는 '파시즘'이 되었다.

파시스트당은 거대한 상흔을 남기고 절멸했지만 이러한 욕망은 국가와 인류의 유전자에 여전히 남아있다. 사회의 신화적 통일성에 집착하며 이견을 허용치 않는 국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며 상부와 주변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시민.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에는 눈을 부라리는 이상한 정의감. 약자를 짓밟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 '질문 있으신가요?'라고 물었을 때 손 드는 사람을 '나대다'고 여기는 가엾은 눈치 전쟁까지.

흥미로운 것은 고대 로마에서 시민 대표자의 호위 무사들이 전쟁을 마치고 로마 영내로 들어올 때의 행동이다. 로마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파스케스 가운데 꽂혀 있던 도끼나 칼날을 빼냈다. 비록 고대 로마가 만민평등 사회는 아니었으나 시민권자가 주권을 가진 곳이었기에 국가의 무력에 우선하는 시민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뜻을 이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면 국가가 지닌 폭력과 판단에 대한 독점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는 말했다. 국가란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사용을 유보한 폭력의 집합이라고. 베버도 말했다. 국가란 개인들 간의 사회계약을 통해 물리적 폭력을 정당하게 독점한 기구라고. 따라서 국가가 폭력을 제대로 독점하지 못하고 사인(私人)에게 폭력을 양도하거나, 국가가 독점한 폭력이 불멸의 당연권인 줄 착각하며 국가폭력을 전횡하는 것을 우리는 국가의 실패라 여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교황이 행한 첫 연설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불의는 잊지 않되 관용하라. 돈보다 생명을 우선하라. 소통을 통해 민주주의를 강화하라. 이 간명한 메시지에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울분 가득한 시민들까지 환호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 현상은 도식적으로 보면 매우 의아하다. 계몽을 통해 근대적 이성의 시대를 열었던 인류가 21세기에 와서 중세적 종교지도자에 열광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천 년을 거스르는 이러한 복고적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 자리에 남은 공허를 채우려는 갈망에 다름 아니다.

이미 교황 방한 이전, 교황방한준비위원장인 강우일 주교는 광화문광장에서 교황 시복식이 거행될 때 세월호 희생자 가족 단식농성장을 보존할 것을 약속하며 '눈물 흘린 사람을 내쫓고 예수님께 사랑의 미사를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가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이 진정 전근대 사회가 아니라면, 눈물 흘린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가는 주체는 종교적 선의지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권을 양도하여 건설한,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보완해가며 만들어온 '국가'가 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한다.

이현석 의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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