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신뢰의 경제학

입력 2014-08-06 07:04:05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다. 신뢰가 쌓여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곳에서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먼저 유망 기업이 발굴되어 투자되고 인수 합병되는 과정이 원활해져 정보 수집과 평가 비용이 적게 든다. 즉 투자자와 투자를 필요로 하는 기업 간에 정보의 흐름이 원활해 투자에 따른 위험도가 줄어든다. 반면 투자자가 기대하는 수익률은 낮아지게 된다.

투자 유치에 따른 부대 비용은 물론 투자 수익률을 단기에 끌어올리기 위하여 기술 개발, 사업 모델링, 제조 플랜트 건설과 판로 개척 등을 차근하게 진행할 수 있어서 사업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투자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면 원금 보장, 최소 수익 보장 등의 장치를 요구하게 되고 기업은 단기간 내 승부를 노리다 사업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투자 유치를 위한 지루한 과정에서 유치 시점을 놓치거나, 천신만고 끝에 투자 유치에 성공했지만 투자 조건에 수많은 꼬리표를 붙여 본 벤처기업가들은 실리콘밸리의 신속한 의사결정이 부러울 뿐이다.

둘째, 우량한 자본을 원활하게 유치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초기 투자 자본의 회수도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욱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다. 창업 초기부터 비슷한 사업부를 가진 기업과 상호 협력하면서 기술 개발, 파일럿 플랜트(실험 장치와 생산 공장과의 중간에 있는 규모의 시험공장), 생산설비 구축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기술이나 사업 모델을 도용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도용한 이력이 있는 사업가는 적어도 실리콘밸리에서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창업에서부터 상용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협업해 온 기업과의 시너지가 크다고 판단될 경우에 창업주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 기업에 인수 합병시킴으로써 투자 자본을 회수하고 또 다른 사업 개시에 몰두한다. 비슷한 업종의 기업들이나 그 업과 유사한 업무 부서를 가진 기업들과 평소 협업해 오면서 서로에 대한 정보도 많고 상호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최적의 인수 파트너 선정과 인수 합병도 큰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벤처 창업 투자 원본 회수 기간이 평균 2년여인 것이 이를 입증한다. 우리나라 벤처기업은 90%가 코스닥 상장을 통하여 투자 원본을 회수하고, 코스닥 상장까지 평균 10년 소요된다. 인수 합병을 통한 창업 투자금 회수는 10% 미만으로 집계된다.

셋째, 우수한 인재들이 기업의 규모나 명성보다는 장래 유망한지,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혁신에 매진하고 있는지를 보고 움직인다. 신뢰 사회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와 인재를 고용하는 기업 간에 상호 정보의 흐름이 원활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매출액이나 명성에만 매달리지 않게 된다. 유망한 벤처기업에 근무하던 전도유망한 청년이 결혼식을 앞두고 배우자 부모님의 요청에 의하여 대기업으로 전직하는 경우를 필자는 자주 목격하였다. 그 청년과 배우자 가족 간의 신뢰, 그 벤처기업과 우리 사회 일반대중 간의 신뢰가 구축되어 있었다면 일어나기 힘든 현상이다.

이력서에 보탤 경력을 위해 실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는 이름 있는 곳에 적을 두고자 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우리 청년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이 같은 신뢰의 경제학이 잘 작동하여 기업 생태계와 금융 생태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뢰를 저버리는 경우에 관용은 없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약속이나 계약을 어기거나 부당한 행위를 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영원히 퇴출당하는 곳이 실리콘 밸리다. 신용과 평판을 관리하는 것이 빼어난 기술, 훌륭한 제품, 멋진 사업 모델을 개발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공동체 생활에서 양심 지키기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가 신뢰 구축에 유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仁)과 의(義)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에 뿌리를 둔 우리나라도 사회적으로 신뢰 구축에 좋은 토양을 가졌다. 그런데 그간 숨 가쁘게 압축적 경제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이러한 토양이 상당히 오염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다. 고 최인호 선생의 '소설 맹자'에서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라고 하였다.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노력이 신뢰하는 소중한 사회적 자본 축적의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명주/포스코기술투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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