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구타의 추억

입력 2014-08-04 11:07:00

윗세대는 더 했겠지만 기자를 포함한 50대 중반 세대의 군대 추억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구타이다. 당시에도 구타는 엄격히 금지됐지만 사병들 세계에서 구타는 하루 일과의 필수 코스였다. 얼마나 구타에 길들여졌는지 어쩌다 구타가 없는 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 낮에 맞지 않으면 밤중에 불려 나와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과 시간 중에 맞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기자의 군 복무 시절에는 윗세대처럼 '5파운드 곡괭이 자루' 또는 야전삽으로 엉덩이나 허벅지를 때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멍이 들어 구타검열에서 발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졸병'이 열중쉬어 자세로 가슴에 힘을 준 상태에서 '고참'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영리한 방법이 사용됐다. 이렇게 하면 얻어맞은 졸병은 숨이 막히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지만 절대 표가 나지 않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졸병이 절대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 고참이 주먹을 날리는 순간 졸병이 겁을 먹고 몸을 뒤로 빼거나 옆으로 움직이면 명치나 상복부에 타격이 간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바로 위 속에 있는 음식물의 역류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사태다. 기자가 상병으로 진급했을 때 눈앞에서 바로 그런 사고가 벌어졌다.

때린 고참은 매우 양순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런 사고를 치게 된 것은 왕고참들이 '요즘 군대 잘 돌아간다'며 바로 아래 기수들을 '조진' 때문이었다. 이럴 때 군기반 임무를 맡은 중간 고참은 왕고참들에게 졸병들 군기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결국 고참에게 보여주기 위한 원치않은 구타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맞아 죽은 그 졸병은 병무청의 행정 실수가 발견돼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태 앞에 당시 고참들이 내린 첫 번째 지시는 '통신보안'이었다. 이것이 그때 그 시절의 우리 군대의 모습이었다.

부대원들의 집단 폭행으로 숨진 육군 28사단 윤 모 일병 사건은 우리 군대가 그때 그 시절에서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금 국방부와 육군본부 홈페이지에는 이래서는 자식을 군대에 보낼 수 없다는 부모들의 절규가 쏟아지고 있다. 기자의 아들은 지난해 9월 무사히 전역했다. 몸 성히 그곳을 빠져나온 아들이 장하고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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