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 힘 이래 좋은 할배 드물 걸…'일흔 장골' 아파트 택배 어르신들

입력 2014-08-02 07:08:18

한 사람이 하루 50여 개 배달, 수고비는 개당 무조건 500원

"우리는 아파트 택배 '꽃할배들'!" 대구 수성시니어클럽 아파트 택배 사업단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택밴데요∼." 택배는 기다리는 사람을 춤추게 한다. 이 기쁨을 배달하는 어르신들이 있다. 여든을 바라보지만 힘은 웬만한 청년들 못지않게 장골이다. 대구 수성시니어클럽 '아파트 택배 사업단'어르신들의 하루를 동행했다.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대구 수성구 수성3가 아파트 단지 앞에 택배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 "모두 118개! 빨리빨리 옮겨요! " 짐 칸에서 물건을 내리는 움직임이 날렵하다. 허리도 꼿꼿하고, 목소리에도 힘이 넘친다. 이날 일꾼들은 모두 일흔이 넘은 '할배들'. 아파트 택배 사업단 단장인 변영록(79) 할아버지는 "내 나이가 제일 많고, 막내가 일흔세 살"이라며 이마에 땀을 닦았다. 이곳은 대규모 아파트 5개가 밀집한 곳으로 택배 업체가 물품을 아파트 앞에 내려놓으면 어르신 9명이 구역을 나눠 아파트 현관 앞까지 배달한다. 이들 중 가장 베테랑은 변영록 할아버지. 벌써 6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택배 물품은 '복불복'이다. 이날의 복병은 어린이용 놀이 매트와 라텍스 침대 매트. 얼핏 봐도 무게와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이러다가 할배들 허리 다 나가겠네." 라텍스 매트 배달에 당첨된 막내 이영재(73)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하루 평균 물량은 50개 정도. 물건 하나당 수당은 무조건 500원으로 화장품도, 침대 매트도 배달비가 같다. 물량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는 추석이지만 가장 힘든 시기는 김장철이다. "절인 배추 한번 들어봤어요? 진짜 무거워. 잘 못하면 비닐에서 물이 다 새고. 저번 김장철에 진짜 고생했다니까."

택배의 생명은 속도와 정확성이다. 어르신들은 물건을 아파트별로 분류한 뒤 매직펜으로 숫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3-701'은 103동 701호라는 뜻이다. "이래 작게 쓰면 뭐가 보이나." 한 할아버지가 배달지 주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젊은 기자가 봐도 지렁이처럼 생긴 숫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변영록 할아버지는 "우리가 눈이 안 좋으니까 박스에 숫자를 크게 써서 정확하게 표시한다. 물건을 전달할 때도 '이 물건이 맞냐'고 추가로 확인한다"고 설명했다. 경비실과 돈독한 관계를 쌓는 것도 중요하다. 한 할아버지가 "사람이 집에 없으면 경비실에서 택배를 맡아준다. 그분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을 거들었다.

본격적인 배달이 시작됐다. 기자는 라텍스 매트를 배달하는 이영재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리어카는 어르신들의 발이다. 리어카를 끌자 잔뜩 쌓인 물건 때문에 한 치 앞이 안 보였다. "따릉 따릉." 할아버지는 손잡이에 고무로 된 자전거 벨을 달았다.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비키라'고 소리 안 지르고 벨을 눌러요. 그러면 서로 기분도 안 상하고 좋지." 아파트 택배 배달은 공동 현관문에서 시작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숫자 헷갈려서 딴 집에 배달하면 안 되잖아요. 이거 하면 치매는 안 걸린다니까." 여기에도 기술이 있다. 먼저 무거운 물건부터 배달해야 하고, 해당 호수로 호출을 한 뒤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헛걸음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도 라텍스 매트 주인은 이날 집에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없애고 나면 그다음 배달은 일사천리다. 두세 번 배달을 하고 나자 할아버지의 체크 셔츠는 금세 땀으로 젖었다. 기자가 돕겠다고 해도 "혼자 할 수 있다"며 고사했다.

일을 하다 보면 얌체족도 많이 만난다. 집에 사람이 없어서 착불 택배 물건을 경비실에 맡겼더니 택배비 3천원을 안내고 물건만 가져갔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준다더니 결국 안 주더라. 그래도 배달하면 '수고한다'고 음료수도 챙겨주고, 웃어주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며 "택배 받으면서 싫어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고 웃었다.

어르신들은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따로 휴가도 없이 일한다. 그래도 이영재 할아버지는 "배달이 좋다"고 말한다. "일하면서 힘쓰니까 운동되지, 돈 벌어서 손자 손녀들 용돈 줄 수 있지. 이렇게 일 끝나고 형님들이랑 회 한 접시 같이 먹으면 진짜 좋지. 앞으로도 계속 할 거야."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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