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대구 예루살렘論

입력 2014-07-12 07:02:46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구를 일컬어 '남한의 예루살렘' 또는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부른다. 이 말은 대구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대구골목투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길이 근대골목이다.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 길을 일컬어 '예루살렘의 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럼 왜 대구가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대구는 북한의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 선교의 중심축이었다. 한 세기 전에 한반도 선교를 담당했던 외국 선교부 중 대구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구역이었다. 평양을 위시한 서북지방과 대구를 위시한 영남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던 북장로회 선교의 결과로 소위 '북평양, 남대구'라는 말이 생겨났다.

평양은 일찍이 신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원산에서 촉발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루면서 한국교회 전체가 갱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요일이면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며 골짜기마다 세워진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우렁찼다. 평양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이야말로 반(半) 천국이요, 예루살렘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평양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서려 있는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1938년 평양에서 열린 기독교 총회는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해방과 더불어 평양을 위시한 북한 5도는 공산주의에 의해 점령됐다. 북한 전역에 흩어진 수천 개의 교회가 삽시간에 훼파되었고 많은 기독교인과 지도자들이 숙청되는 아픔을 겪었다.

평양이 무너진 후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대구의 의미는 더욱 커졌다. 과거 평양이 감당했던 역할을 대구가 떠맡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낙동강 전투를 마지노선으로 빼앗긴 국토를 회복함으로써 대구는 호국의 성지가 됐다. 북녘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하해 대구의 기독교는 영적으로 깨어났다. 전쟁 중이었지만 평양에 있던 신학교를 대신할 학교가 대구에 세워졌고, 그 결과 전쟁 후 많은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대구는 평양을 대신할 새로운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다.

그동안 대구가 사회경제적으로 긴 침체의 터널을 지나면서 기독교 역시 깊은 늪에 빠져 있는 듯하다. 교인들의 고령화와 성장의 쇠퇴 현상으로 인해 교회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대구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대구가 민족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다시 한 번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기원을 계속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대구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길일까?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고, 교인이 교인다워야 한다. 한 사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 회복되어야 한다.

지금도 한 해 수만 명이 대구 기독교 유적지의 핵심인 동산을 방문하고 있다. 그들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돌아가는가? 화려했던 유적만이 아니라 본질을 회복하려는 대구 기독교의 모습을 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명실상부하게 대구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우뚝 서는 그날까지 우리 자신을 향한 채근을 멈출 수 없다.

박창식 달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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