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동 유적 '전국구' 철기문화…대구 '납작도끼' 日서 대량 발견
동검(銅劍)은 찌르고 철검은 벤다. 철(鐵)의 압도적 우위, 무기로서 청동기'철기의 운명은 여기서 갈렸다. 찔림은 국부적 손상이고 베임은 치명적 상처이기 때문이다.
철은 지구 상에서 가장 흔한 광물이다. 지표면 근처에 얕게 묻혀 있고 매장량도 엄청나다. 그런데도 인류 문명의 이기(利器)로 먼저 등장한 것은 구리였다. 그 이유는 바로 융해점이다. 구리는 800, 900도에서 녹는다. 선사시대 환경에서도 그 정도 열은 만들어냈다.
철로 넘어가면 문제는 달라진다. 철을 녹이려면 1천200도의 열이 필요하다. 자연 상태에서 이 정도 열 가공은 불가능하고 도가니나 풀무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은 구리에 문명의 첫걸음을 내주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철기시대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철기의 등장 이후 인류 생활은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단단해진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월등히 높였고 날카로운 칼은 전투력을 현저히 올렸다.
농업 혁명, 정복 전쟁의 본격화, 철기 혁명의 바람은 대구에서도 불었다. 살상력이 배가된 무기의 등장 이후 지역 내 정치세력이나 신라, 가야 등 주변 집단들과의 긴장관계는 훨씬 고조되었다. 생산력 향상 이후 장신구, 부장, 의례, 토기, 음식 등 사회 전 분야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선사와 역사의 전환점, 대구의 철기시대로 떠나보자.
◆철기 등장 이후 청동은 장신구로=한국 사학계에서 철기는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로 구분한다. 철기가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에서 한반도에 들어오는 BC 300년부터 서력기원 전후까지를 초기 철기시대로, 기원후부터 AD 300년까지를 원삼국 시대 또는 삼한(三韓)시대로 부른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도끼, 낫, 거울, 따비, 마구(馬具) 같은 생활용구부터 칼, 창, 화살촉, 꺾창 같은 무기들이 모두 철기로 바뀌게 된다. 강도나 성능, 파괴력에서 월등한 철제 도구, 무기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청동기는 대부분 의기화(儀器化), 제기화하게 된다. 역사 시간에 귀에 익은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細形銅劍), 광형동과(廣形銅戈) 같은 청동기들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청동기의 의기화 문제를 한 번 짚어보자. 신소재가 출현하면 이전 시대 금속은 도태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철, 동의 동거는 한동안 계속된다. 두 금속의 공존시대를 여는 틈새시장이 생겨났던 것이다. 바로 위신재(威信財)의 수요다. 알다시피 초기 철기시대는 성읍 국가(城邑國家) 정치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이 시기 군장(君長)들은 그들의 권위에 걸맞은 장신구를 찾게 되는데 이 요구에 잘 들어맞은 것이 청동이다.
다른 금속에 비해 가공이 쉽고 모양이 수려해 부족장의 장엄구로서는 최적의 소재였다. 당연히 실용은 뒷전이었다. 광형동과, 꺾창은 손잡이가 허술해 착병(着柄'칼자루를 쥐거나 잡음)이 힘들고 무딘 날은 과일이나 깎을 정도였다. 동경(銅鏡)도 표면에 무늬, 장식이 많아 미용, 거울 용도로는 거의 효용이 없다.
◆철기시대 후 급속한 사회 분화'세력 재편=철제 무기 등장 후 가장 큰 사회적 변화는 부족 간 전투가 빈번해진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대구지역에서 급속한 사회 분화가 진전되고 전반적인 세력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런 현상은 당시 고분의 부장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팔달동, 만촌동, 평리동, 비산동 유적에서 다양한 청동기, 철기, 한경(漢鏡) 등 위세품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전의 시기보다 양적,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 무렵에 대구에 유력한 정치체제와 수장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역 간 교역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청동기 시대 교류 범위가 마을, 부족 간 교류에 그쳤다면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지역 간, 장거리 교역망이 확인된다. 지난 13회에 언급한 한경(漢鏡)이나 방제경을 통해서도 이미 중국, 일본 등 동북아를 넘나드는 광역 교역망이 밝혀졌다. 연암산 석기제작장(15회)에서도 부족의 자급자족을 넘어서는 장거리 네트워크가 확인된 바 있다.
2000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북구 팔달동 유적에서는 광범위한 마구(馬具)들이 출토됐다. 철기시대 지역에서 말이 생산이나 전투용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는 증거다. 말은 전투에서도 유용하지만, 선사시대에 기동성 면에서 기존의 공간 개념을 바꿔놓은 혁신 수단이었다. 보통 선사인들의 일일 행동반경을 최대 40㎞로 본다면 말은 수백㎞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 인류의 생활반경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영남의 철기 문화, 일본에도 영향=팔달동 유적에서 출토된 납작도끼(板狀鐵斧)도 흥미롭다. 이 도끼는 보통의 뭉툭한 주조(鑄造)형이 아닌 얇은 형태의 단조(鍛造)형이다. 칼이나 낫 수준의 정교한 작업에 쓰였던 도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도끼가 일본에서도 대량으로 발견돼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영남 지방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 대방, 왜에 수출됐다는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대구, 경주, 김해 지방에서 생산된 철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그곳 철기 문화에 기여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청동기 시대 벼농사가 열도에 전래된 이래 철기 시대에도 한반도 문물이 계속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 거주지의 입지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이전의 청동기시대 취락이 신천, 동화천, 진천천, 욱수천 등 하천변에 있었다면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구릉 정상부나 금호강, 낙동강 주변으로 옮겨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자가 팔달동, 신천동, 만촌동 고분군이라면 연암산, 침산, 화원 토성은 후자의 사례에 해당한다.
◆마무리하며=대구 철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은 단연 팔달동 유적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북구 팔달동 145번지, 지금의 대백인터빌 자리다. 금호강과 팔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9기에 이르는 고분에서는 동모, 동과는 물론 철검, 투겁창, 납작도끼 등 초기 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망라되고 있다.
팔달동 유적은 영남지방 철기 문화의 모든 특징이 잘 녹아 있고 부장품 규모나 수준에서도 '전국구급'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역 학계에서도 그 공로를 인정해 '대구 철기 문화의 종결자'라는 별칭도 붙였다. 지역의 문명을 일구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화를 일본 열도에까지 전파했으니 대구야말로 동북아 철기문화의 '가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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