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칼라 신교육을 받은 팔십 대의 할머니들에게 김내성이라는 이름을 말해보라. 그들은 상당히 아련한 표정이 되어서 "아, 김내성, 연애소설 '청춘극장' 작가"라고 답할 것이다. 그들에게 김내성은 이미 지나가 버린 청춘기의 낭만적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게 전부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김내성이 우리나라 최초의 탐정소설 작가였으며, 식민지 시기 유일한 탐정소설 전문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국 유명작가 이름과 작품이 망라되어 있는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는 물론, 대부분의 한국문학선집에서도 김내성의 이름이나 작품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김내성이 와세다대학교 독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것은 1936년이었다. 귀국할 때 그가 지닌 꿈은 참으로 소박하였다. 독법학부 출신이 꿈꾸는 판, 검사나, 관리로서 성공하기보다 좋은 탐정소설 작가가 되려고 하였다. 일본어로 쓴 탐정소설이 일본 탐정소설 전문잡지 문예현상모집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되어, 일본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던 만큼, 김내성은 탐정작가로서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게다가 나이는 아직 채 서른이 되지 않았다. 귀국 당시의 김내성에게는 탐정소설의 황무지인 조선 문단을 개척하겠다는 오만함이 뒤섞인 패기가 있었다. 그러나 패기 가득 찬 이 청년이 놓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조선과 조선 독자의 현주소, 즉 '현실'이었다.
조선 귀국 후 김내성이 처음 발표한 작품은 '가상범인'(1937)이다. 일본 탐정소설 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된 자신의 일본어 작품을 조선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번역과정에서 김내성은 다양한 내용을 첨가하고 삭제한다. 난해한 추리의 과정은 가능한 한 없애고 남녀 주인공의 연애 장면은 가능한 한 많이 넣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요즘 한국 드라마는 법정에 가서 '연애'하고, 병원에 가서 '연애'하고, 수사하면서 '연애'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한국 대중문화의 현실이 1930년대부터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의 결과는 당연했다. 약간의 추리적 요소가 가미된 신파적 '연애소설'이 한 편 탄생한 것이다. 그다음 작품도, 또 그다음 작품도 역시나 결과는 같았다. 언제나 머리 아픈 '추리'의 과정은 가능한 한 없애고, 자극적인 '연애' 스토리를 과다하게 강조하였다. 물론 김내성 스스로 이 결과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독자들은 그 누구도 어렵고 난해한 탐정소설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셜록 홈스의 등장을 뒷받침하는 1800년대 말 영국의 그 놀라운 과학적 발전이 1937년 조선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탐정소설 작가로서 김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김내성은 해방과 더불어 '청춘극장'을 비롯한 연애소설 창작으로 돌아선 후, 1957년 5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조선 귀국과 더불어 가졌던 그 소박하고도 순수했던 꿈을 한 번도 실현해보지 못한 채였다. 김내성이 죽은 지 5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이 시점에 와서도 여전히 탐정문학은 대중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대중 취향의 결과인지, 아니면 아직껏 우리 대중의 의식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김내성이 그 시기 자신의 꿈을 견지하기 위해 강하게 버텨주었다면 현재 한국 추리문학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는 마지막까지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몇몇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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