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은 읽을수록 불편 사람들과 삶 날것으로 보여주니까
지금은 여행책 '홍수의 시대'다. 어떤 이들은 일주일간 태국 여행을 다녀와서 책 한 권을 뚝딱 써내고, 전문 사진작가 못지않은 솜씨로 감각적인 사진을 뽐내는 여행책을 내놓기도 한다. 직장을 관두고 세계 일주를 한 뒤 펴낸 여행책도 이제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는 이 같은 유행을 거스르는 듯하다.
무슨 배짱인지, 그 흔한 여행 사진 한 장 없다. 하지만 글만 빼곡한 이 여행책은 벌써 1천 부가 넘게 팔렸고, 지금은 2쇄 추가 발행에 들어갔다. 이 책의 저자는 공중보건의사인 이현석(30) 씨. 의사가 쓴 사진 없는 여행책이라는 사실이 기자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이달 16일 저녁, 대구의 출판사 '한티재'에서 그를 만났다.
◆불친절한 여행서, 그 속에 담긴 사람 이야기
이 책은 불친절하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가이드북 같은 친절함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개인 경험을 담은 체험형 여행책도 아니다. 스페인과 우즈베키스탄, 인도, 모로코 등 다양한 여행지가 등장하지만 어떻게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이 책의 정체가 뭘까.
"제 책은 여행서라기보다 여행을 재료로 해서 쓴 글이에요. '어디로 가라'고 하는 책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고 하는 책이죠." 이 씨가 명쾌하게 답했다.
이 책은 사람에 관한 책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타자를 통해 개인의 삶부터 사회, 나아가 역사를 들여다본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12명. 이 씨는 베트남 호찌민에서 남베트남군 통역병이었던 '미스터 빈'을,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장 에밀리아'를 만났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만난 인물들을 통해 그 주변을 에워싼 세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분석한다.
사람이 주인공인 책이지만, 인물 사진을 대신한 것은 '일러스트'다. 그림은 이 씨의 친한 후배가 실제 인물과 조금 다르게 재구성한 뒤 그렸다. 처음부터 인터뷰할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 씨는 "내 책은 인물 중심이다. 그 사람들을 둘러싼 환경과 역사를 통해 내가 배우고, 느낀 과정을 적은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내 이야기가 없다"고 설명했다.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다. 이 씨는 인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인도 북부의 우타르프라데시에서 '워크캠프' 봉사 활동을 하며 2주간 머물렀을 때였다. "낡은 스쿠터에 네 식구가 타고 우리를 찾아왔어요. 백일해에 걸린 갓난아기를 데리고요. 인도 오지에서 약을 얻으러 왔는데 나한테 감기약 말고 없었어요. '가까운 병원에 가라'고 하니까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려면 오토바이를 타고 이틀이나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막연한 건강 불평등이 여기서는 삶 자체였어요."
◆원고도 안 보고 계약한 출판사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는 이 씨가 작가라는 타이틀로 처음 펴낸 책이다. 이 씨의 여행 기록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출판사 '한티재' 덕분이다. 인문학 서적을 주로 펴내는 한티재는 작지만 내실있는 대구 지역 출판사다.
출판 이야기가 처음으로 오간 곳은 '술자리'였다. 2년 전 송년회 술자리 모임에서 한티재 오은지 대표 부부를 만났고, 오 대표는 이 씨의 원고 '이야기'만 듣고 "재밌겠다. 한 번 해보자"고 쿨하게 수락했다. 여행 사진 한 장 없는 여행책 출판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말이다.
오 대표는 "20대 저자가 쓴 글인데도 생각이 깊어서 맘에 들었다. 요즘 예쁜 사진과 감각적인 느낌을 담은 여행책은 아주 많지만 장소와 역사에 대해 고민하는 글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책이 팔리든 안 팔리든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진심이 통했던 걸까. 이 씨의 원고는 지난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에 선정돼 출판지원금을 받았고, 출판이 한결 수월해졌다. 지난해 12월 초판 1쇄로 1천 부를 출판했고, 얼마 전 추가로 1천 부를 더 찍어냈다. 침체된 출판 시장에서 지역 출판사의 2쇄 발행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이 씨는 작가로서, 또 의사로서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있다. "세상을 날것 그대로 보게 만드는 불편한 글을 쓰고 싶어요. 또 '인식의 벽'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송곳으로 생각에 흠을 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얼마 전 소아과학 교과서 저자인 홍창의 선생님을 뵀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 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날은 전남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이 침몰한 날이었다. 뉴스에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녀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왔다.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지막 문장이 계속 생각났다. 세상이 아프니 마음이 불편했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사진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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