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조로 푼 한시] 이천 (伊川)/ 어우당 유몽인

입력 2014-04-03 14:06:46

가난한 아낙의 눈물만 뺨에 가득하고

가난했던 현실은 너무 많았다. 배를 움켜쥐고 날마다 날품팔이를 하고, 남의 처자 길쌈을 하면서 살아갔다. 관리들의 수탈은 더욱 심했다. 서민들의 집에 들이닥쳐 있는 대로 빼앗아 갔다. 오전에 왔다가 다시 오후에 오는가 하면 돈이며 물건이며 모두 빼앗아갔다. '남편 겨울옷을 짜고 있는데 베틀에 매여 있는 베를 잘라 관리에게 주고 나니, 오후엔 다른 관리가 와서 세금 명목의 물건을 내놓으라 하네'라고 말하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아낙이 베 짜면서 뺨에 가득 눈물 괴고

낭군 위해 겨울옷을 촘촘히 짜렸더니

아침에 관리에게 건네니 다른 관리 또 찾았네.

貧女鳴梭淚滿腮 寒衣初擬爲郞裁

빈녀명사루만시 한의초의위랑재

明朝裂與催租吏 一吏纔歸一吏來

명조열여최조리 일리재귀일리래

【한자와 어구】

貧女: 가난한 아낙. 鳴梭: 베를 짜다. 淚滿: 눈물이 가득하다. 腮: 뺨. 寒衣: 겨울옷. 初: 처음에는. 擬: ~하려고 하다. 爲郞裁: 낭군 옷 짜다(만들다)// 明朝: 밝은 아침에. 裂與: 끊어서 주다. 催租吏: 곡식 재촉하는 관리. 一吏: 한 관리 纔歸: 겨우 돌아가다. 一吏來: 한(다른) 관리가 오다.

'가난한 아낙의 눈물만 뺨에 가득하고'(伊川)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성리학의 대가 성혼의 문인인 그는 스승의 교훈을 거역해 파문당하여 성혼이 죽은 뒤에 그를 모욕하는 글을 써서 비난을 받았다. 황해도관찰사, 좌승지, 도승지를 거치는 등 승승장구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가난한 아낙이 베를 짜니 눈물이 뺨에 가득하고/ 겨울옷, 처음에는 낭군 위해 짜려 했구나// 아침에 칼로 끊어서 관리에게 건네니/ 한 관리 돌아가자 다른 관리 찾아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이천에서 본 여인이'로 번역된다. 강원도 이천군에 있는 면에서 보았던 어떤 사실을 시문으로 읊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을 음영한 것이 아니요, 지방 관리들의 수탈 모습이었다. 조선 사회가 극도로 피폐하여 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정도였던가를 짐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적나라한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보인다.

위 시에서 시인의 생각을 적은 대목은 한마디도 없다. 낭군을 위해 베를 짜고 있다는 것 외에는 들은 내용도 없다. 모두는 본 내용을 서술 형식으로 시문만 썼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시인의 간곡한 염원이라면 수탈의 비참함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화자는 처절한 여인의 비통함을 한마디로 쏟아내고 있다. 남편의 겨울옷을 짜고 있던 베다. 그런 정성으로 짜던 베를 끊어 주고 났더니, 오후에 또 다른 관리가 찾아왔다는 대목에서 비참한 생활상을 고발하는 시적 묘미를 살려 내는 효과를 부린다.

유몽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문장가,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선조 41년(1608) 1월에 도승지가 됐고, 그 후 즉위한 광해군(조선 15대왕)을 왕으로 모셨다.

1582년 진사시 합격,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명나라까지 따라가 외교 관련 업무를 맡아 처리했다. 1592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당시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글을 가르쳤다.

당색으로는 북인에 속하였다 하나, 인조반정 때 대북파가 추진한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거리를 둬 관직에서 물러났다. 붕당 자체에 회의적이어서 서인, 남인, 북인들과 당파를 초월한 사귐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1623년 7월, 광해군의 복귀를 꾀하려 한다는 현령 유응형(柳應泂)의 무고로 인해 역모죄로 아들 약(瀹)과 함께 사형됐다. 저서로 '어우야담'과 '어우집'이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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